본문 바로가기

정보통신 트랜드

한·미 FTA, 우리의 고민은?

90년대 중반 우루과이 라운드(UR)협상 당시 미국 협상 대표들이 한국 정부 대표들을 상대로 VAN 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해 우리 협상팀을 어리둥절하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이야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VAN을 ‘부가가치통신망(Value-added network)’이 아니라 미국인이 좋아하는 자동차 모델 중 하나로 인식했던 관료가 상당수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런 해프닝이 있었다면 자동차 시장을 개방하라는 협상 상대국의 갑작스런 요구에 난감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우리 협상 팀에게 VAN 시장 개방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우리 사회에는 통신시장 개방을 통신주권 상실로 보는 시각이 의외로 팽배했다. UR협상 등 몇 차례의 통상 협상을 거친 후 국내 통신시장이 어느 정도 개방됐지만 아직 우리의 통신주권이 외국에 넘어갔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국내 통신업체들의 경쟁력도 웬만큼 높아진 모양이다.

 최근 타결된 한미 FTA 협상에 대해 IT업계의 평가가 비교적 긍정적이다.

시장 개방에 따라 국내 IT업계가 받을 충격이 그렇게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효과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업계는 한미 FTA가 샌드위치 신세에 놓여 있는 한국 경제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줄 것으로 잔뜩 기대한다.

 하지만 성급한 낙관론은 금물이다. 미국의 통신사업자들이나 프로그램 공급업체(PP)들의 간접투자가 100% 허용됨에 따라 국내 법인 설립을 통한 우회진출의 길이 활짝 열렸으며 온라인 콘텐츠에 대한 무관세 조치가 디지털 콘텐츠 분야의 무역역조 현상이 심화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역으로 국내 제품의 미국 진출 전망은 얼마나 밝을까. 물론 미국 통관 시 부과되는 물품 취급수수료가 철폐되고 통관시간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국내 업체에 상당한 활력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평균 관세율이 2%에 불과한 점을 감안할 때 전자제품에 대한 무관세 조치가 국내 제품의 미국 수출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 확신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한미 FTA체제 초기에는 미국의 일부 전자제품이 한국의 높은 관세장벽을 우회해 밀려들어오면서 국내 산업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

 국내 전자업체들은 그동안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의 전략을 구사해 왔다. 중국·대만 등 전자 제품의 파상적인 공세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제품을 과감하게 털어내고 차세대 제품으로 주력을 옮겨왔다. 그러나 중국·대만 등 기업들의 기술개발 속도나 가격 경쟁력을 감안할 때 이 같은 전략이 언제까지 먹혀들지 가늠하기 힘들다. 실제로 한미 FTA가 발효되는 시점에도 현재의 경쟁구도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계속적으로 찾아내지 않으면 한미 FTA체제의 전략적인 이점은 금방 소멸될 수 있다.

 한미 FTA가 국내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도약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 전반의 경쟁력과 효율성을 냉철하게 따져보는 일이 무엇보다 급하다. 불행히도 우리 경제의 활력은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고 참여정부가 입버릇처럼 외쳐대고 있는 혁신의 효과는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많은 사람이 원인을 알고 있고 해법도 제시하고 있다. 지금은 정부의 의지가 중요한 때다.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를 풀어주고 기업가 정신을 북돋워줘야 한다. 그래야만 기업들도 경쟁국과의 기술적 격차를 벌일 수 있는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

 한미 FTA의 타결 후 경쟁국들이 한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저력이 무섭기 때문이다. 그들의 경계심을 ‘구체적인 위협’의 수준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장길수 논설위원 ksjang@etnews.co.kr

○ 신문게재일자 : 2007/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