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세상에 우리가 산다.
세상을 가득 메운 불확실성
날씨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우리의 미래가 또 그렇다.
슈퍼 컴퓨터로도 게릴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비를 퍼붓는 날씨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중국에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의 양이 1000미리를 넘기며 우리의 상식을 파괴하고
안정적인 간접투자의 활성화와 증시주변여건의 개선으로 가장 견조한 펀더맨탈을
자랑한다던 대한민국 증시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기침으로 몸져 누워버렸다.
이제는 달라졌다고 외치며 승승장구하던 증시는 하루 10%의 변동폭으로 오르내리며
단 하루만에 2년치 이자를 날려버린다.
패닉상태의 개미들이 투매를 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미국증시가 올라 버리고
그러면 다시 대한민국 증시는 폭등해 버린다.
미국넘들 문제인데 우리나라가 왜 더 난리를 피워야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경제란
언제나예측불허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 속에 가리워 있다.
마치 도박처럼 도 아니면 모의 엄청난 리스크에 노후와 기족의 행복을 투자해야 하는
우리의 미래도 암울하기 짝이 없다.
백날 경제의 독립선언을 외쳐도 우리의 투자환경은 제3국 보다 불안하고 활화산처럼
터져올라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가버리는 냄비 국민성은 경제주권을 되찾는데 치명적인
걸림돌이다.
우린 내일 또 어떤 변화와 충격이 우리의 안정과 평화를 파괴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미래란 희망과 불안이 항상 공존하는 곳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는 확실한 방법은 현실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고 미래의 죽음에
대비한 확실한 보험은 오늘을 즐기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이 있다면 우린 미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좀더 즐겁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정말로 소중한 오늘을 음미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내린다던 비는 기상청을 또 고문관으로 만들었다.
오늘 하루는 만화책이나 보며 뒹굴거리려 했는데 아파트 숲 사이로 햇빛이 스미어 온다.
유례 없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벌써 처서가 코앞이고 이 여름도 결국 긴 꼬리를
내리고 말 것이다.
올해는 동생들과 일정이 맞지 않아 바다 구경도 못했다.
이번 주가 지나면 서해바다도 끝물이란 생각이 들어 휴일의 단잠에 빠져 있는 가족들을
재촉해서 서해안으로 길을 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준비 없이 떠났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가족 모두 보약 한재씩 지어 먹기로 했다.
마눌과 함께하고 있는 100대 명산 여행길 8번째로 예산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을 가족이
함께 오르고 대천 바다에서 그 열기를 식히며 가는 여름을 배웅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사람들은 요즘 같은 염천의 산행에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난 여름산행이야 말로 진정한
보신산행이라 생각한다.
의학이야 폭염이 신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역설하겠지만 나는 오랜 임상학적
경험으로 한여름에 쏟는 땀이 건강과 피부에 그리고 정신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다.
그 길 위에 남겨진 기쁨과 행복을 알고 뜨거운 태양아래 흘린 땀의 역설적인 후련함을
알고 있기에 여름이면 지리산 종주길에 나서서 땀으로 세속의 진폐를 토해내고 고원의
바람과 지리산의 생수로 영혼과 육체를 세정하는 순례의 의식을 치루었던 것이다.
아마 허리를 다치지 않았으면 올해도 여름산행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어느 심산의
계곡을 방황하며 여름을 보냈으리라.
대전에서 아침을 먹고 11시 시경에 수덕사에 도착했다.
태양은 마지막 여름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는 듯 뜨거운 열기를 덕산벌에 쏟아 놓고 었고 우리는
물갈비 한대로 전의를 가다듬으며 그렇게 폭염 속으로 진군했다.
수덕사 경내는 농산물 전시회와 법회로 많은 불자들로 소란스러웠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마이크를 통해 탈랜트 전원주씨가 목소리가 들린다.
키 크는 거 빼 놓고 부처님이 모두 들어 주셨으니 여러분들도 열심히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고 기도 하란 말을 하며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유서 깊은 명찰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수덕사는 벌써 네 번 째 쯤 될게다.
늘 큰절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주의의 산세와 어우러진 절의 모습에 마음이 편안 해 짐을 느낄 수 있다.
명찰이란 풍수지리학상으로 늘 명산에 은거하는 법이라 그럴 게다.
수덕사
백제 침류왕 원년 동진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가 세웠다고 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사찰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문헌에 수덕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이
수덕사에서 주석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의 사격
(寺格)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554~597년(백제 위덕왕) - 지명법사가 수도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
601년(백제 무왕 2) - 혜현법사가 수덕사에 처음 주석하며 <법화경>을 독송하고 <삼론>을 강론함.
627년(백제 무왕 28) - 혜현이 58세로 입적함.
(수덕사 홈페이지 참조)
수덕사에 얽힌 설화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고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우리는 갈 길이 바빠서 부처님께 예를 차리지도 못한 채 수덕사 옆으로 난 길을 계곡길을 따라 정상을 올랐다.
(수덕사 홈페이지)
11:22 : 수덕사 주차장
11:42 : 수덕사
12:10 : 미륵불
12:20 : 만공탑
12:23 : 정혜사
12:33 : 아래가 보이는 안부 바위
12:46 : 정상
13:57 : 다시 수덕사
14:20 : 주차장
높지 않은 산의 계곡은 짙은 수림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흘러가는 물길로 한 낯의 더위를 식혀주고 있다.
계곡에 발 담구고 앉아 있으면 시원하겠지만 바람이 없는 날이라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오름 길에도
땀이 많이 난다.
지난 일요일 금오산보다 더 무더운 날씨다.
미륵불이 서 있는 샘터에 도착했다.
만공스님이 세웠다 한다.
태현이와 미륵불에게 삼배를 올리고 시원한 약수를 마셨다.
땀으로 노폐물을 걸러내고 시원한 생수로 몸에 원기를 불어 넣는다.
중생의 8가지 고통에 대해서 쓰여진 안내판이 있고 한 켠에 향운각이 서 있다.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부딪혀야 할 고통들도 늘 우리 인생의 한 몫 이었다.
고통을 벗어나 궁극의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만나기 위한 노력이 쌓여 삶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또한 살아 있는 자의 숙명 일 게다.
정해진 우리 인생 길은 참으로 짧다.
우습다
한갓 백살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길임을 알면서도 왜 그리 평생을 살 것처럼 욕심이 사나워지고 세상 수 많은
일들이 걱정하고 다니는지.…
모두 어느 날 허허로운 바람을 따라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우리 인생 아닌가?
나이가 들면서 늘 비워내고 채워야 할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한다.
세월의 연륜이 쌓였어도 더 소중한 것들을 밀어 놓고 늘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언제나 불쌍한
중생의 모습 그대로이다.
늘 버려야 할 것들을 움켜쥐고 채워야 할 것들에는 인색하다.
세월이 그렇다고 강변하지만 사실 모두 마음의 문제이고 수양의 문제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집착하고 골몰하면서 다시 돌아 오지 않을 나의 날들과 사라져 가는 소중한 것 들에
대해서는 애석해 하지 않는다.
심산의 한가운데서 쉽사리 비워내던 답답한 가슴은 아직 채 낫지 않은 허리 부상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정화되지
못하고 부질 없는 미망으로 채워져 있다.
“미륵이시여
사바세상의 번뇌와 미망이 모두 땀으로 훌훌 날리워 가고 샘물처럼 정갈 한 삶의 기쁨과 깨달음이 마음을 채우게
하소서….”
만공스님의 사리탑을 모신 만공탑이다
정혜사로 오르는 계단 길
1200 계단을 오르면 스님들의 정진하는 도량 정혜사가 있다.
그 옛날 동안거 때는 300명의 스님들이 세상과 격리된 채 깨달음을 위해 용맹정진 하던 곳이라 한다
능인선원 이라고 그 옛날 유서깊은 유명한 선방이었다는데 산 중턱에 그렇게 넓게 터를 닦고 멋드러진
현대식 사찰을 지어놓아 웬지 어색하고 지나간 날의 고즈녘한 향기를 느낄 수 없다.
아마도 늘 수행신도로 붐비는 수덕사 덕분이리라
정헤사 도량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는 스님들
정상오름 길에 집채 같은 바위를 만나고 비로소 눈부신 덕산벌이 내려다 보인다.
멀리 우리가 출발한 주차장과 수덕사가 아래로 보이고 바라보는 것 만으로 편암함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산세의 흐름과 아늑한 풍광이 눈에 들어 온다.
정상 바로 아래 안부에서 건너다 보이는 가야산
무성한 수림을 벗어버리고 뙤약볕 아래 드러난 정상에는 한 줄기 바람도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리지어 허공을 선회하는 잠자리들의 축하공연 속에 이마가 벗겨진 덕숭산 고스락에 섰다.
어디에서 왔는지 한 무리의 산악회 사람들이 정상 한 켠 그늘에서 식사하고 사진 찍느라 분주하다.
마눌과 나야 작정한 100대 명산 순례길이니 즐거운 여행길이지만 중학교 이후에 아삐와 산행을 접었던
아이들로써는 폭염 속의 산행을 몹시 힘들어 한다.
먼저 올라서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따라 붙는다.
태현이 보다 은비가 훨씬 더 힘들어 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래도 곧잘 산을 탔는데 공부 하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다.
우리의 신체는 쓰지 않으면 퇴화의 길을 걷는다.
자연 속에 소요하며 땀 흘리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허심탄회하게 조우하는 것이야 말로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잿빛 둥지에 머무르는 시간을 줄일수록 우리는 흔쾌한 삶의 기쁨의 시간을 늘일 수 있다.
100대 명산 제 8산
아이들이 자라고 처음 함께 오른 의미 있는 덕숭산이다.
가족이란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고 믿고 의지하며 인생 항로를 함께 항해해 가는 동반자들이다.
어른이 되면서 늘 자신의 목소리에 귀 귀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선이라 믿었다.
관례에 따른 가족이란 이름의 나의 세상과 우주를 만들고 나서야 책임과 의무를 자각했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나의 자유와 꿈을 절충하고 포기하는 방법을 배웠다.
가족이란 마을 동구밖에 자리한 느티나무와 같은 조화와 안정감이다.
그리고 그 그늘아래 누어 있는 휴식과 같다.
모두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늘 즐겁고 행복하게 한 인생 살다 가기를 바랄 뿐이다.
준비해간 복숭아를 한 개씩 깎아 먹었다.
마눌은 배가 고팠는지 비상식량으로 오래 전 갈무리 해두었던 초코파이 두개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 먹어 버렸다.
빵이 배낭 속에서 찌부러지고 유통기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는데…
황량한 바위 위에 기쁘게 앉아 있는 아기 소나무
암자로 가는 석문
능선 가파른 내림길의 영지
하여간 우리는 온 가족이 8번 째 100대 명산 주유를 함께 하고 오르지 않은 가파른 길을 둘러 수덕사로
내려 왔다.
내리는 길에 작은 영지버섯 몇 개를 캐고 개울에서 머리를 감았다.
시간은 오후 2시 30분 쯤 되었고 시장한 차에 에어콘이 빵빵하게 돌아 가는 식당에 들러 산채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바다로 떠났다.
약도를 보니 견성암으로 내려서려면 정혜사를 통과하여 산허리를 돌아서 내려서야 했다.
견성암 쪽으로 길을 잡으려다 능선의 가파른 산길을 따라내려 아래쪽 계곡에서 합류했다.
은비가 아빠는 왜 이리 힘들길로 가냐고 했다.
마눌 왈 "아빠는 늘 사람들이 안 다니는 힘든길을 좋아 한단다"
그것도 맞다.
가지 않은 길에는 늘 기대와 희망이 있는 법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가지에 조용히 앉아 있는 파랑새를 만날지도 모른다.
신나는 태현
태양과 파도와 함께한 여름을 즐기며
은비
마눌이 찍은 하늘
작열하는 태양이 눈부신 대천 바다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우리는 파라솔 하나를 세내고 튜브를 2개 빌려서 시원한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바다에는 시원한 해풍이 불어가고 아득한 수평선 쪽에는 통통배가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가끔 바닷물 속에 잠기기도 하고 때로는 물위를 떠다니며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 갈 때 쯤 뭍으로 올라 왔다.
올해도 여름 바다를 잃어 버리지 않았다.
무슨 규정처럼 여름바다는 가족과 함께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아직 남아 있다.
떨어지는 하루의 태양이 바라다보이는 횟집의 창가에 앉아 펄펄 뛰는 회를 먹으며 즐거운
하루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떠나지 못한 2007 뜨거운 여름의 즉흥적인 가족여행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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