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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여행의 기술 - 아랭 드 보통

출발 /기대에 대하여 / 런던 해머스미스,바베이도스 /J.K 위스망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나의 유순한 상상력이 알아서 갖다 바치는 광경을 거부하고 늙은 멍텅구리들처럼 해외여행이 필요하고,재미있고,

유용할 것이라고 믿다니,내 정신이 잠시 착란을 일으켰던 것이 분명하다.

 

자연은 가장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장소에서 돌아오자마자 기억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며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 즉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분을 지배하는 엄격하고 무자비한 논리

 

인간은 호텔을 건축하고, 만을 준설하는 등 엄청난 프로젝트를 이루어 내면서도, 기본적인 심리적인 매듭 몇 개로 그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행복의 핵심적인 요소는 물질적이나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 휴게소 ,공항,비행기,기차 /보들레르 ,에드워드호퍼

 

호퍼는 또한 기차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풍경을 가로질러가는 반쯤 빈 열차 안의 분위기에 마음이 끌렸다.

바깥에서 바퀴들이 철로에 부딪히며 박자에 맞춰 소리를 내는 동안

안을 지배하는 정적, 소리와 창밖의 풍경이 어우러져 빚어지는 꿈결 같은 분위기.

이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일상적 자아 밖으로 나와,

안정된 환경에서라면 얻기 힘든 생각과 기억에 접근하게 된다.

<293호 열차 C>에서 책을 읽으며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끌어내는 장소를 찾기 힘들다.

우리의 눈 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살다 보면 소통과 대화를 위한 노력이 시들하고 답답해질 때가 있다.

스스로 고립과 단절을 택하고 싶어 진다.

그건 어쩌면 자신과의 대화가 더 필요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 때가 바로 잿빛 도시를 떠나야 할 때다.

마음이 동하고 나면 명상과 사유에 대한 조용한 갈망이 찾아 든다.

그냥 내버려 두라

스스로의 생각이 어떤 장소를 선택 하던….

결국 내가 찾아가는 길은 자연으로 나 있을 것이다..

낯선 풍경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잃어버린 나를 만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난 아직 익숙치 않다.

동물들은 받아들일 줄 알지만 인간들은 기대만 한다.”

가령 어떤 토끼도 오늘 아침 해가 쨍쨍해야 호수에서 신나게 놀텐데라고 하지 않는다.

토끼는 그저 토끼라서 행복할 뿐인데 사람만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대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해 고통을 자초한다.

 

렛있비 냅두라

물길을 거스르지 마라

흘러가는 물길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복잡한 세상에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겠냐만은

혹시 아나

과학의 눈부신 발전이 가슴에 털을 숭숭내고 마음을 튼튼한 철심장으로 바꾸어 놓을지

-       동아일보 오늘과 내일 고미석 기자

 

그렇다, 나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익숙치 않다.

가난한 삶이란 어떤 삶인지

따뜻한 삶이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두 익숙지 않다.

어느 빈 땅에 옷을 벗고 나서야

세상의 만사가 훤히 보이고

웃고 포기하는 일이 편안해 질까.

                                   (마종기 익숙치 않다)

 

나의 감각들은 단단한 땅,바람 ,밀려오는 밤의 은밀한 소리에 다시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익숙한 것들이라 너무 오랜만이지만 적응하는데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멀리 떨어져 ,고속도로 옆의 언덕에 자리잡은 이 외딴 휴게소에는 시가 있었다.

시적인 느낌을 주는 장소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디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 않는다.”

단조로움을 뛰어넘는 변화

 

진짜 욕망은 떠나는 것이었다.

그가 결론을 내린대로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어디로라도 떠나는 것

보들레르

 

우린 여행지에 대해 고민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떠나는 것이다.

절실히 원하는가?

떠나고 싶은 충동과 갈망이 살아 있는가?

그 곳이 어디라도 좋다.

낯선 곳 이라면 어디라도

 

무언가 젖고 싶은 날에.

가끔 답답해진 내가 소리친다.

떠나 ! 열심히 일했잖아

아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잖아

당신 가슴이 터지기 전에라고

 

가끔 눈꼬리에 주름이 말한다.

세상은 이제 조금씩 접히고 있어

더 늦기 전에 어딘가로 떠나 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떠난다..

내 얼굴의 주름과 내 가슴의 주름을 펴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경박하고 억지스런 웃음이 아닌 내면적인 환하고 밝은 웃음을 웃기 위해서

높은 산에서

아님 눈부신 자연 속에서

오늘 내 영혼이 춤추는 걸 알기에

어느 낡고 작은 것 하나가 추억과 감상을 자극하기만 해도

떠나고 싶어진다.

 

 

제주도는 섬이어서 좋다.

그 곳에 가는 것만으로 난 복잡하고 잡다한 것들을 육지에 남겨두고 조용히 은둔의 땅으로 고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에서부터 느낀다.

우리의 삶은 저렇게 작았었구나.

우리가 큰일날 것처럼 목메고 살았던 우리 삶이 저렇게 작았었구나

하늘은 나는 새나 신에게 우린 그렇게 보였겠구나

저 밑에서 그렇게 커 보이던 탐욕과 질투 그리고  분노와 배신은 보이지 않는다.

 

 

만일 부엌에서 시식을 했다면 평범했거나 심지어 불쾌하게 느껴졌을 음식이 구름이 있는 곳에서는 새로운 맛을

띠고 구미를 돋운다.

억지 웃음과 같은 긴장된 명랑함

 

이곳에서의 외로움은 모두가 나그네인 곳,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사랑을 향한 좌절된 갈망이 건축과 조명에 의해

인정을 받고 또 잔인하게 기억되는 곳에서 피어 올랐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줄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 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차를 몰고 가야 할 곳은 외로운 휴게소 인지 모른다.

 

동기   /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암스테르담/ 귀스타브 플로베르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곳이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간다.

 

열차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플로베르 철학의 핵심은 인간은 영적인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오줌 누고 똥을 누는 피조물이라는 믿음,이런

솔직한  생각도 우리의 세계관과 합쳐져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사실상 진흙과 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의 몸,그리고 돼지나 사면발이의 본능보다 낮은 수준의 본능을 갖추고

있는 인간의 몸에는 순수하고 비물질적인 것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플로베르가 에르네스트 수슈발리에에게 한 말이다.

 

만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특히 거시기가 길어지는 복을요.”

 

이 우울한 짐승처럼 독특한 우아함을 지닌 생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낙타들이 병사들처럼 한 줄로 서서 지평선을 질러 나아가는 모습을 한 번 보셔야 합니다.

타조처럼 고개를 쭉 빼고 ,끝도 없이 가지요, 끝도 없이 …”

 

그는 낙타의 슬픈 표정에, 어색함과 숙명적인 쾌활함의 결합에 감동을 받았다.

날이 저물 무렵이다. 똥 같구나 , 이 강력한 말로 우리는 인간의 모든 비참함을 앞에 놓고 우리 자신을 위로 할 수

있구나.

 

매혹적인 사람이 이국적인 땅에 가면 자신의 나라에서 가지고 있던 매력에 그 사람이 있는 장소가 주는 매력이

보태진다.

오 주여 내가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이 영원한 무기력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데이아네이라(헤라클레스의 부인, 남편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남편의 옷에 네수스 피를 발라 보냈는데 헤라클

레스가 이 옷을 입고 독혈증에 걸려 죽었다.)의 저고리도 권태가 내 삶에 달라붙은 것만큼 완벽하게 헤라클레스의

 등에 달라붙지는 못했으리라!. 다만 권태는 그의 저고리보다 천천히 내 삶을 갉아먹을 뿐이다.

 

어머니는 동양이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사실 그 이상이었습니다.

동양은 내가 그 곳에 대해 가지고 있던 좁은 관념을 뛰어넘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이전에 모호했던 것들이 모두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모든 것, 기린이나 악어와 영혼의 형제 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바람에 흩뿌려져 이 나라 저 나라에 태어났다.

 

호기심에 대하여 /마드리드 /알렉산더 폰 흄볼트

 

어느 쪽에도 이득이 되지 않는 환대

 

여행을 하는 사람은 덧없고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선 시야를 가지게 되며 ,자신이 자신의 집,자신의 종족,자신의

도시의 정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오래된 건물들을 보며 자신이 완전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상속자이자

꽃이자 열매로 성장해왔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는 용서받을 수 있고 또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

느끼게 된다.

 

우리는 1 6000점의 새로운 식물종을 가지고 돌아가는 대신, 저녁초대를 받을 만하지는 못하지

만 우리의 삶을 고양해주는 작은 생각들을 가지고 여행에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호기심의 나침반

세상을 향해 올바른 질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는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를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 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여행은 피상적인 지리적 논리에 따라 우리의 호기심을 왜곡한다.

 

 

풍경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레이크 디스트릭스/윌리엄 워즈워즈

 

시간이 지나자 차창은 길고 검은 거울로 변하여,우리는 창문에서 우리 자신의 얼굴밖에 볼 수가

없었다.

여행은 그러하다.

가슴에 담은 풍경들과 창 밖을 지나는 풍경들과 차이를 느끼며 바라보다 검게 변한 차창에서 자

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행은 건강을 회복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조화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한 때 그렇게 빛나던 광채가

지금 내 눈에서 영원히 사라진들 어떠랴.

풀의 광휘의 시간, 꽃의 영광의 시간을

다시 불러오지 못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뒤에 남은 거에서 힘을 찾으리라.

 

<영생 불멸의 노래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토마스 드 퀸시 Thomas De Quincey (1785~1859, 영국의 비평가,소설가)는 워즈워즈가 평생 28

킬로미터에서 28 8000 킬로미터를 걸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느치처럼 걸었다.

느치는 비스듬하게 움직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벌레였다.

자연 도시의 삶으로 인한 심리적 피해를 치료하는 불가결한 약

자연을 자주 여행하는 것이 도시의 악을 씻어내는 데 필수적인 해독제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우리의 건강보다는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도시의 영향 때문이었다.

시인은 도시가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 낸다고 비난했다.

사회 위계에서 우리의 지위에 대한 불안 ,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질투 ,낯선 사람들의 눈 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그들은 먹고 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

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어떻게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낯선 사람으로 살아갈까?

심지어 어떻게 서로의 이름을 모를까?

 

자연의 구원의 힘을 절실하게 느꼈다.

 

 

서곡

 

내가 세상과 뒤섞이면서도

내가 가진 소박한 즐거움에 만족하며,

하찮은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을

멀리하며 살아왔다면

그것은 그대 덕분이다….

그대 바람과 요란한 폭포…. 그대 덕이다.

그대 산이여 , 그대의 덕이다. 오 자연이여 !

 

나무는 인내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아침에도 그리고 앞으로 다가 올 수많은 비 오는 날에도 아무런 불평 없이

한데 나와 앉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폭풍우 속에서도 언짢아 하지 않으며, 자신이 있는 곳을 떠나 다른 골짜기로 건너가고 싶

은 즉흥적인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

 

워즈워즈는 떡갈나무 밑에 앉아 빗소리를 듣거나,허공에 금이 가듯 잎들 사이에 햇살이 비쳐드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좋아했다. 

 

워즈워즈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서 도시

생활에서 나타나는 비꼬인 충동들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인간과 양은 서로를 바라보며 경이를 느꼈다.

무엇 때문에 나는 나이고 양은 양일까?

그 생물은 나와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행성들이 바위와 증기와 정적으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예외로 꼽히는 이 독특한 행성에

서 나와 함께 자고 숨쉬며 살아 있는 생물이다.

 

콜라지는 워즈워즈의 초기 시들을 돌아보면서 , 그 시에 나타난 천재성을 이렇게 규정했다.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

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

보게 하는 것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 (寶庫)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워즈워즈에 따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는 내부의 선()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냇물과 숲이 우거진 웅장한 골짜기를 굽어 보면서 바위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자연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도 의미심장하게 바꿀 수 있다.

 

절벽의 웅장함을 보면 우리 내부에서 변하지 않는 고결한 것이 솟아 오르며 , 그 규모를 보면 경외감에 사로잡혀

 선뜻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존중하게 된다.

 

 

나는 위대하거나 아름다운 것들을 통해서

인간을 처음으로 보았고,

그러한 것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인간과 교감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보통 세상의

모든 곳에서 들끓고 있는

비열함, 이기적인 관심,

거친 행동거지, 그리고 욕정에 대한

확실한 안전판과 방호벽이 세워졌다.

 

이 수많은 광경들이 내 망막 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지금 이 순간, 내 평생 단 하루도 이 이미지

들로부터 행복을 얻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기쁨이 밀려온다.”

수십 년 뒤에도 알프스는 계속 워즈워즈 안에서 살아 남아, 기억 속에서 그 곳을 불러낼 때 마다

그의 영혼은 힘을 얻었다.

자연 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올 때마다 현

재의 어려움과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그는 자연 속의  이러한 경험을 시간의 점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잇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진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땐 다시 일으켜 세운다.

 

이것은 산골에서 골짜기를 굽어보며 보낸 몇 순간을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쓸모 있

는 순간으로 꼽을 수 있으며 따라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만큼 정확하게 기억할 가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나무들은 건강하고 충만한 인상을 주었다.

세상은 낡았고 또 자주 슬프다는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늘 속에 얼굴을 묻고, 그들의 냄새로 힘을 회복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 장면이 내 기억 속에 고정될 줄은 몰랐다.

 

내가 가끔 안락의자에 누워

마음을 비우거나 사색적인 기분에 잠겼을 때

수선화들은 그 내면의 눈앞에 번쩍하고 나타난다. …

그러면 내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수선화와 어울려 춤을 춘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숭고함에 대하여 /시나이 사막 / 에드먼드 버크 ,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본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또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한히 광대한 공간들 (Infinie immensite des espaces

 que j’ignore et qui m’ignorent) 이 작은 공간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고, 다른 때가 아닌 지금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갖다 놓았는가?

 

(팡세  Penses ) 단장 68

 

그래서 여행은 본능일지 모른다.

 

워즈워즈는 우리 영혼에 유익한 감정들을 느끼기 위해 풍경 속을 돌아다녀 보라고 권했다.

나는 작아진 느낌을 얻기 위해 사막으로 출발했다.

 

자신이 작다는 느낌이 만족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 황량하고도 압도적인 공간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이 적절한 단어로 표현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곳에서 사람은 숭고하다는 느낌을 경험하기 마련이고, 또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면 다

른사람들도 알아들을 것이라고 예상하게 된다.

 

광할하게 트인 시골, 개발되지 않은 넓은 사막, 첩첩이 늘어선 거대한 산맥,높은 바위와 절벽과

넓은 물앞에서 기쁨이 주는 고요와 놀라움을 느낀다.

 

그랑드 샤르트뢰즈로 올라가는 짧은 여행 동안 나는 열 걸음 정도를 내디딜 때마다 억누를 수

없는 탄성을 내지르곤 했다.

그것은 단순한 절벽도 아니요 격류도 아니요, 낭떠러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와 시를 잉태하고 있었다.

 

이것은 4억년 전에 만들어진 골짜기를 통해 느끼는 감정, 2300미터 높이의 화강암 산을 통해 느

끼는 감정, 일련의 가파른 협곡 벽에 표시된 수천 년의 침식을 통해 느끼는 감정이다.

이런 것들 옆에 있으면 인간은 그저 늦게 나타난 먼지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숭고함은 우주의 힘, 나이, 크기 앞에서 인간의 약함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유쾌할 수 있고 심지어 사람을 도취 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기쁨일까?

왜 이런 작아지는 느낌을 찾게 되는 걸까?

화강암 바닥, 뜨겁게 달구어진 자갈이 깔린 분지,용암이 굳어버린 것 같은 산맥이 가없이 뻗어나

가다 산정들이 강렬한 파란색 하늘의 가장자리에서 스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왜 절망이 아니라 환

희를 느낄까?

 

굴욕은 인간세상에서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 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 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

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사막의 돌과 남극의 얼음 벌판에 쓰인 교훈이다.

이 교훈은 아주 웅장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우리를 초월하는 것에 짓눌리

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러한 장대한 필연성에 복종하는 특권을 누리고 돌

아올 수 있다.

경외감은 어느새 숭배하고 싶은 욕망으로 바뀌어 갈 수 있다.

 

이 곳의 산과 골짜기를 보면 자연스럽게 이 행성이 우리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우리 손이 아닌

다른 것들에 의해 , 즉 우리가 모을 수 있는 힘보다 더 큰 힘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우리의 소멸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 단순한 자연은 소유하지 못한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가 이곳에 손을 댄

것이 틀림 없다는 인상이다.

이런 풍경은 하느님의 더럽혀지지 않은 작품이며, 정신은 그 곳을 보면서 영원한 것들을 생각하

게 된다.

 

자연의 가장 고귀한 직무는 신의 유령 역할을 맡는 것이다.”

 

이런 풍경을 통해서 이제 도시와 경작된 시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초월적 감정들을 경험하는 것

 

외롭지만 절망에 빠진 사람이 신에게 왜 자신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신은 그에게 사막과 산을 보라고, 강과 빙산을 보라고 , 바다와 하늘을 보라고 명령한다.

숭고한 장소들이 이런 심각하고 다급한 질문의 답이 되었던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재와 같은 격언과 흙더미에 불과한 변화.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마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산 옆에 있으면 네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네게는 비논리 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 논리적인 것

은 아니다 

우리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해라.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우리를 부드럽게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인간의 삶도 똑같이 압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

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

려보낼 그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

이다.

 

 

예술 /눈을 열어주는 마술에 대하여 /프로방스/빈센트 반 고호

 

나는 아름다움을 찾고 있었다.

나를 즐겁게 해 보아라, 나를 활기차게 해 보아라.” 이것이 내가 플로방스의 올리브 나무와 사이

프러스와 하늘에 던지는 소리 없는 도전이었다.

매우 막막하면서도 허술한 요구였다.

내 눈은 이런 자유에 어리둥절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어떤 장소 자체에 내재한 특질들에 의해 도는 우리 심리의 내부 회로에

의해 결정나는 것 같다.

 

어쩌면 어떤 장면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파악하는 감각을 기르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시각

예술을 공부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일단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 예술작품은 자잘한 방식으로 우리가 여행하고 싶은

곳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반 고흐는 1889년까지 아를에 머무는데 그 15개월 동안 약 200점의 그림을 그리고, 100점의 스

케치를 하고, 200통의 편지를 쓴다.

 

나는 한 낮에 햇빛을 잔뜩 받으면서 일한다.

나는 매미처럼 즐거워 한다.

정말이지, 서른다섯이나 먹어서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물다섯에 이 땅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흐가 남부로 이사 온 이유 : 첫째는 남부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작품을 통

하여 다른 사람들이 남부를 보도록 돕고 싶었던 것이다.

즉 세상의 한 부분을 그릴 수 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다는

믿음 이었다.

 

자연에 완전히 진실하라!” –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는가

자연을 그렇게 속박하여 그림 속에 집어 넣을 수 있겠는가?

자연 가운데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무한하다.!

따라서 화가는 자연 한 가운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그린다.

화가는 무엇을 좋아 하는가?

자기가 그릴 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자연을 보는 사람의 마음?

자연 속에서 내 마음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밤은 낮보다 색깔이 훨씬 풍부해….

잘 보면 어떤 별들은 레몬 빛 노란색이고, 어떤 별들은 분홍색,또는 녹색,파란색,물망초색으로 빛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내가 굳이 나서지 않는다 해도, 그냥 짙은 남색 표면 위에 하얀 점들만 찍어 놓은 것으로 불충분 하다는

것은 분명하잖아.”

 

그린다는 것은 현실의 어떤 측면을 작품에 포함시키고 어떤 측면을 배제할지를 선택하는 과정

왜곡,생략,색깔의 대체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현실-담은꼴

장소에 대한 진실한 관념을 표현하는 것

 

원래의 모습에는 감탄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닮게 그린 그림에는 감탄하니, 그림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화가는 단지 재현만 하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선택을 하고 강조를 한다.

화가는 그들이 그려낸 현실의 모습이 현실의 귀중한 특징들을 살려내고 있을 때에만 진정한 찬사를 받는다.

 

나아가서 파스칼이 암시한 것과는 달리, 우리가 감탄했던 그림이 시야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그 그림에서

묘사한 장소에 대한 관심도 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의 감상은 예술에서 현실의 세계로 옮겨질 수 있다.

처음에는 캔버스 위에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들을 발견하지만, 나중에는 캔버스가 그려진 장소에서 그런

요소들을 환영하게 된다.

반 고흐의 그림들 너머로 사이프러스를 계속 볼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화가들의 눈을 통해 어떤 풍경을 보고 나면 그 풍경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예술과 여행의 욕망 사이의 오래된 관계를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대기는 고요하다.

시원한 시냇물 소리 또는 호수를 가르며 노를 젓는 소리만 정적을 깰 뿐이다.

조지프 에디슨은 1712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연의 작품이 예술작품을 닮을수록 더욱더 기쁨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퉁이는 예술가들이 그려주거나 글로 써준 뒤에야만 돌아보게 된다는 주장을

 완벽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휘슬러 이전에는 아무도 런던 안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반 고흐 이전에는 아무도 프로방스의 사이프

러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주장 만큼이나 신랄하다.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 레이크디스트릭스,마드리드,암스테르담,바베이도스,런던독랜즈

/존러스킨/마드리드

 

가 보았지만 제대로 보지 않았던 곳 또 무관심하게 지나친 곳들 가운데 어떤 곳들이 가끔 눈에 번쩍 뛰면서

우리를 압도 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많은 아름다움을 만났다.

 

궁상맞은 호텔을 피하고 싶어 산책을 나선 관찰자의 망막에서만 짧은 순간 만났을 뿐이다.

 

이 벽은 초봄의 비약한 햇볕으로 자기 몸의 온기를 조금씩 늘려 갔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벽돌의 꺼칠꺼칠하고 울퉁불퉁한 표면을 어루만져 보았다.

가벼워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벽돌 앞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바베이도스 동해안에서는 아프리카 해안까지 거칠 것이 없이 뻗어 있는 짙은 보라색 바다를 내다 보았다.

갑자기 섬이 작고 약해 보였다.

꾸민 듯한 느낌을 주던 분홍색 야생 꽃들과 텁수룩해 보이던 나무들이 바다의 맨송맨송한 단조로움에 대한

감동적인 저항으로 느껴졌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의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만 자주 나타나거나, 계절과 빛과 날씨가 보기 드물게 조화를 이룬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

어떻게 공중에 든 열차를 할바사탕처럼 생긴 벽돌을,잉글랜드 골짜기를 붙들 것인가?

카메라가 하나의 방법이다.

사진을 찍으면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보고 촉발된 근질근질한 소유욕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

좀더 온건한 방법은 떠나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얻듯이, 잃어버린 것을 기억나게 해주는 뭔가를, 그릇이나,

칠기상자나, 샌들을 사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그의 작업의 핵심 이었다.

 

단지 쉬고 노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찾아 돌아 다녔다.

하루에 40킬로미터 이상을 가지 않았고, 몇 킬로미터마다 멈춰서 풍경을 감상했다.

이것은 러스킨의 평생에 걸친 여행 방법이 되었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가지 중심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 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 (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인류에게 글쓰는 기술보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며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모든 아이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만

 하는 데생기술은 지금까지 워낙 무시되고 남용되었기 때문에, 그 첫 번째 원칙을 아는 사람이 심지어 그것을

직업으로 하는 교사 가운데도 천 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다.

 

 

 

하마가 하마로 태어나듯이 어떤 사람은 화가로 태어난다.

자신을 기린으로 만들 수 없듯이 자신을 화가로도 만들 수도 없다.

나는 목수를 화가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목수로서 더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데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좀 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자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데생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아름다움의 이미지들을 간직하고 나왔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자신의 일에 반영시킬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와 같은 것을 보기 바랍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을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총알에게는 빨리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진정한 사람 이라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러스킨의 관광산업에 대한 강한 분노

 

여러분은 기차를 타고 달리는 것도 기쁨의 하나라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샤펜하우젠 폭포 위에 철교를 세워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루체른 절벽에 잇는 텔의 예배당 옆에 터널을 뚫었습니다.

여러분은 제네바 호수의 클라렌스 호숫가를 파괴했습니다.

영국에는 여러분이 으르렁거리는 불덩어리를 채워 넣지 않은 고요한 골짜기가 하나도 없으며, 외국 도시도

여러분이 뻗어나가는 곳에는 사람을 잠식하는 하얀 나병 같은 호텔이 들어서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알프스 산맥도 곰 사육장에서 곰들이 오르내리는 비누 기둥으로 여깁니다.

여러분은 그곳을 올라갔다가 다시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기쁨의 비명을 질러 댑니다.

 

테크놀로지는 아름다움에 쉽게 다가가게 해줄지 모르지만, 그 것을 소유하거나 감상하는 과정을 간단히 만들어

 주지 않는다.

 

데생 바깥의 선을 안으로 옮기는 것

나는 풀밭에 누워 자라는 풀잎을 그리곤 했다.

초원의 구석구석, 또는 이끼 낀 강둑이 나의 소유가 될 때까지

 

 

풍경한 진정한 소유는 그 요소들을 살피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에 달려 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기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카메라는 보는 것과 살피는 것 사이의 구별, 보는 것과 소유하는 것 사이의 구별을 흐려버린다.

 

당신의 예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

그것은 조개 껍질이나 돌멩이에 대한 찬양 일 수도 있다.

대충 그림을 그리더라도 우리가 전에는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몰랐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나는 평생 떡갈나무를 많이 보았으나, 랭데일 골짜기에서 한 시간 동안 스케치를 해본 뒤에야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감상하고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우리의 취향에 대한 설명을 얻게 되며’ ‘미학죽 어름다움과 추함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러스킨은 4년 동안 가르치고 그림에 대한 교본을 쓰면서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을 정리하여, 자시의 동기는

 사람들이 물질적 우주에서 신의 작품의 아름다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하고 싶은

욕망이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이 녹색 길을 따라 걸어 간다.

이 두 사람이 지각하는 경치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길과 나무를 볼 것이다.

그는 나무가 녹색임을 지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태양이 빛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반면 스케치를 하는 사람은 무엇을 볼까?

그의 눈은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고 예쁜 것의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꿰뚫어 보는데 익숙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햇빛이 소나기처럼 잘게 나뉘어 머리 위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잎들 사이로 흩어지고

마침내, 공기가 에메랄드 빛으로 가득 차는 모습을 관찰한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가지들이 잎들의 베일을 헤치고 나오는 모습을 볼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색 이기와 하얀색과 파란색, 자주색과 빨간색으로 얼룩덜룩한 환상적인지의류가

부드럽게 하나로 섞여 아름다운 옷 한 벌을 이루는 것을 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굳히려면 글을 써야 한다고, 그의 말로 하자면 말로 그려야한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그가 데생으로 아무리 존경을 받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 그리고 그가 빅토리아

여왕 시대 말기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그의 말 그림때문 이었다.

매력적인 장소는 보통 언어의 영역에서 우리의 능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호수가 예쁘다는 관념에 안주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 넓은 호수에서 매력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거기서 연상되는 것이 무엇인가?’

크다는 날보다 더 좋은 말이 없을까?’

 

하루 종일 입을 열고 떠드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늘 정오에 지평선 가장자리에 늘어섰던 높이 솟은

하얀 산들의 모양과 절벽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은 없는가?

남쪽에서 나온 가는 빛살이 그 정상들을 후려치던 모습, 마침내 먼지 같은 파란 비 속에서 그 정상들이 녹아

 무너져 내리던 모습을 본 사람은 없는가?

어젯밤 햇빛이 떠날 때 죽은 구름들이 추던 춤을 본 사람은 없는가?

서풍이 낙엽처럼 그 구름들을 몰고 가던 것을 본 사람은 없는가?

 

그는 많은 장소들이 미학적인 기준이 아니라 심리적인 기준에서 우리에게 아름답게 비친다는 점을 인식했다.

즉 색깔의 조화나 대칭,비례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나 분위기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러스킨이 묘사한 소나무와 바위

알프스 절벽에서 소나무를 올려다 보노라면 오래지 않아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소나무들은 사람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의 돌출부나 위험한 바위 턱에 고요히 모여 있는데, 각기 옆에

있는 나무의 그림자 같다.

그러나 꼼짝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서로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 곳에 닿을 수도 없고, 그들에게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저 나무들은 한 번도 인간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저 나무들은 바람의 소리를 제외한 모든 소리들 너머 저 위에 있다.

어떤 발도 그들의 떨어진 잎을 흩어놓은 적이 없다.

저 나무들은 너무도 불편한 자세로 서 있지만 강철 같은 의지를 드러내고 있어, 바위도 그 옆에서는 구부러지고

부서진 것처럼 보인다.

저 나무들이 가냘픈 생명에 감추어진 어두운 에너지나 매혹적인 자존심이 드러내는 단조로움과 비교하면, 바위는

연약하고, 허약하고, 일관성이 없게 보인다.

 

동시에 안개는 노스탤지어를 불러 일으켰다.

안개 낀 밤은 마치 어떤 냄새처럼 우리를 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던 대로 데려갈 수도 있다.

 

러스킨이 예술의 두 가지 목적이라 말했던 것 고통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헤아려 보는 것 가운데

하나는 따라가보려고 시도했다.

 

나는 보는 것이 그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그림을 배우기 위하여 자연을 보라고 가르치기 보다는, 자연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라고

 가르치겠습니다.”

 

 

귀환 / 습관에 대하여 /  런던/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메스트르의 작품은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통찰로부터 출발했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 보다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지금 하늘이 잠들어 있는 인류를 위해 펼쳐 놓은 이 숭고한 광경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산책 나가거나, 극장에 몰려오는 사람들이 잠시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서 빛을 발하는 찬란한 별자리를 감상하는데

무슨 돈이 들까?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를 입고 자신의 방안에 있는 것을 만족하면서,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 보라고 슬며시 우리 옆구리를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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