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은 일이 있어 낙동정맥 길을 떠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이를 먹긴 먹은 듯 합니다.
그 옛날 백두대간 종주 때처럼 일단 떠나고 보자는 비장함은 사라졌습니다.
머지않아 사라져 갈 2010년의 황홀한 가을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겐 가을날의 토요일이 아직 남아 있고
갑자기 덕유산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내가 가슴의 울림이라 말하는 느닺없는 충동은 늘 준비동작 없이 찾아 옵니다.
생뚱맞게….
혼자 떠난 설악여행 길에서 가을의 목마름이 해갈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맥길이 막히고서 어디론가 다시 홀로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눈을 감으면
내 귀 밑을 스치는 가을바람과
그 바람 길에 실려오는 낙엽 마르는 냄새
내게 가을은 병입니다.
휴일 알박기 결혼식 때문에 혼자 근교산의 언저리를 맴돌았었습니다.
덕분에 모처럼 계룡산과 대둔산의 호젓한 새벽 길을 열 수 있었습니다.
잊었던 새벽산의 청명함을 다시 만나고서 채워지지 않은 가을의 공허가 덕유산의 아침을
떠올렸습니다.
일 자 : 2010년 11월 6일 토요일
산행지 : 덕유산 향적봉-남덕유-영각사
산행시간 : 9시간 40분
경유지별 시간
대전 출발 |
04:20 |
리조트 출발 |
05:40 |
향적봉(1614m, 남덕유 14.8km) |
07:20 |
식사후 대피소 출발 |
08:00 |
2그루 고사목 |
08:11 |
중봉(,동엽령2.2km, 향적봉 2.1km,남덕유 12.7km) |
08:16 |
송계삼거리(동엽령2.2km/향적봉2.1km) |
08:43 |
동엽령 |
09:23 |
돌무더기 봉우리 이정표(삿갓재4.2km,/무룡산2.1km/동엽령2km) |
10:03 |
무룡산(1492m,삿갓재대피소2.1km ,남덕유15km/향적봉,8.4km ) |
10:42 |
삿갓재 대피소 |
11:25 |
삿갓봉(1419m) |
12:14 |
월성치(삿갓재대피소2.0km,황점3.8km,남덕유6.4km/향적봉8,4) |
13:02 |
남덕유(향적봉15km, 영각사3.4km, 총 18.4km) |
13:55 |
영각사 지킴터 |
15:22 |
오랫동안 참기는 참았습니다.
세상 삶이 시들해 질 때 순례길처럼 떠나던 덕유의 새벽 길
막상 떠나고 싶어 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혼자 새벽의 들창을 밀고 어둠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사라진 건 아닌지
늘 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열정과 감동이 사라진 건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익숙한 고독의 냄새를 맡으며 안개에 쌓인 대진고속도를 달렸습니다.
새벽 길을 열어 가끔 이렇게 속도를 내다 보면 지나간 시간의 향기와 추억이 밀려
옵니다.
어쩌면 나는 그것이 세월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나는 새볔녘에 다시 젊어지는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5시 40분
산신령님께 예의 차리려 꽃단장 한다고 좀 늦었습니다.
어둠과 적막에 쌓인 설천하우스 주차장
멀리 어딘가에서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새벽은 아직 기척도 없는데
어둠의 휘장을 걷어내며 무주 리조트의 어둠 속으로 혼자 떠났습니다.
오래 전에 혼자 어둠 속을 걸어가는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가끔 나를 고립시키는 어둠이 오히려 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둠 속에 둥그러니 드러나는 나를 바라보는 것
늘 바뻐서 돌아볼 겨를 없었던 나를 돌아보며 밀린 이야기는 하는 이 시간이
어쩌면 바보처럼 흘려보낸 많은 시간들보다 더 소중한 시간 입니다.
리조트로 오르면 그 훼손과 상처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늘 구천동 계곡 길을 따라 향적봉에
오르곤 했습니다.
덕유의 일출을 만나려면 너무 믾은 시간을 걸어야 하기에 잠을 자지 않고 떠나야 합니다.
세월이 더 멀리 흘러온 오늘
잠을 설치고 먼 길을 걸으면 눈은 더이상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고 지친 가슴은 감동에도
울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리조트로 오르는 길은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처럼 일종의 타협인 셈입니다.
잠을 더 자고 떠나도 되고 어둠 속에서는 버림받은 황폐한 슬루프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고 …
덕유산 종주를 하지 않고 한 해를 보낸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벌써 저만치 흘렀습니다..
작년 영각사 처마밑에서 홀로 밤을 보내고 남덕유를 올랐습니다.
몇 년의 공백을 깨고 덕유로 떠난 날인데
아쉽게도 흐린날이라 해돋이를 보지 못하고 허리의 통증으로 비오는 동엽령으로 내려섰습니다.
더 한 해를 보내고 세월이 허리의 통증을 걷어간 오늘다시 울컥 마음이 동한 순례 길입니다.
아직 늙지 않았습니다.
홀로 어둠의 들창을 열고 떠날 수 있을 만큼 게으름에 물들지 않았고
칠흑의 어둠은 아직 내 마음의 평화를 가리지 못했습니다.
7시 10분에 해가 뜬다더니 6시 30분 정도에 동편 하늘이 무지개 색 여명으로 물들고 나서 태양은
6시 55분에 산릉사이로 붉은 축복을 올렸습니다.
마음이 동한 날 설천봉 바로 아래서 잊었던 감동과 추억을 만났습니다.
향적봉에서 해맞이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시간을 다시 4년 전으로 돌린 것처럼 기뻤습니다.
맑게 깨어나는 덕유의 아침과 일출의 장엄함이 다시 내 가슴을 흔들었고 옅은 운무가 흘러다니는
덕유나라의 아침은 신비롭고 청명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황금빛 능선을 걸어가며 내 영혼이 기쁨의 춤을 추었습니다.
황량한 고독의 역설적인 충만함
가을은 쓸쓸하지 않는 낭만을 바람 길에 날리고 계절의 우수는 떠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푸른 하늘과 맑은 바람과 함께 걸어가는 길 입니다.
추억은 능선 어디에나 걸려 있습니다.
시간과 거리의 개념이 사라진 그 길에서 따뜻한 기억들과 아름다운 상념들이 스치는 가벼운 발걸음
뒤로 조용히 따라 왔습니다.
벌써 다갈색의 평화로움에 휩싸여가는 덕유의 늦은 가을
가지의 나뭇잎을 모두 털어낸 덕유의 늦가을 풍광은 소박하고 푸근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주목은 여전히 빈 몸으로 푸른 잎새를 피워내고
백암봉도 무룡산도 잘 있습니다.
어느 고독한 시인의 무덤처럼
길에서 비켜나 조용히 앉아 있는 삿갓봉 너머로 가을은 멀리 떠났고
기다림과 휴식은 월성치 나무 그늘아래 아직 서성이고 있습니다.
비안개 흐르던 남덕유에서 지나온 길을 바라 보았습니다.
내가 살아온 인생처럼 멀고 아득한 그 길에서 내가 밟고 걸어온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혼자의 여행을 포기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동하는 대로 떠난 날
진한 계절의 낭만과 지나간 추억을 만났습니다.
산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살아감이 어때야 하는지에 관하여....
그래도 기념사진 한장 찍으려 했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덕유나라 조망을 하며 홀로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한 떼의 대학생 무리가 올라 왔습니다.
향적봉에서 왔다하니 와우 이저씨 멋쟁이 하면서
사진을 찍어 주는데 사진사처럼 세세히 포즈를 잡아 줍니다.
멋쟁이 아저씨 화이팅 ! 기분좋은 너털웃음 입니다.
영각사에는 3시 20분에 도착했습니다.
어두운 무주리조트를 떠난지 9시간 30분 만입니다.
서상가는 버스는 2시 15분에 이미 떠났고 4시 45분에 떠나는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남덕유 쪽의 대중교통은 참으로 불편합니다.
황점으로 내려가면 택시비 4만 5000원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시간이 잘 맞지 않고 거창으로 갔다가 무주로 가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영각사에서 리조트로 가는 택시비는 5만원이라 하니 대중교통으로 가는데 까지 가보고 택시를 타기로 했습니다.
서상에서 갈아타고 장계에서 갈아타고 무주에서 도합 3번 버스를 갈아타야 합니다.
불편하지만 일찍 내려오면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어짜피 버스여행도 여유로운 여행길의 일부입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잠을 자던지 책을 읽던지 ….
영각사를 둘러 보았습니다.
그 밤에는 경내를 둘러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남덕유 하산을 하고 떠나는 몇몇이 있어 물어 보았는데 서상으로 떠나는 차편은 없습니다..
버스가 오기 5분 전에 한 분의 산님이 정류장에 나타났습니다.
잠시 정류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전에서 오신 젊은 산님 입니다.
서상에다 승용자를 세워놓고 아침 첫버스로 육십령에서 내려 할미봉과 덕유서봉, 남덕유산을 거쳐서
영각사로 하산했다 합니다.
나처럼 가을을 타는 남자 입니다.
덕유산신령님은 이런 만남도 주선해 두셨습니다.
나는 덕분에 서상에서 무주 버스 터미날 까지 새로운 산친구와 이러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편하게
올 수 있었고 6시 리조트 경유 거창으로 떠나는 버스를 타고 리조트 입구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하루 꼬박 걸린 여행길이지만 나름 의미 있는 길이었습니다.
4년 만에 다시 덕유 종주 길을 다시 열었고 큰 산의 교훈과 감동을 다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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