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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백두대간

아들과 부르는 노래 6 - 백두대간 제 6구간 (무령고개-영취산-깃대봉-육십령)

 

 

 

 

 

 

 

무령고개에서 영취산 오르는 길

 

우측으로 흘러가는 금.호남 정맥

 

영취산 운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가장 시원한 바람이 뭔지 알아요?

웃음꽃과  웃음바람

그 꽃을 기어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벌레 한 마리는

헤벌레….

 

도시에서 만나기 어려워도 산 길에서는 쉽게 만나는 것들이다..

산에는 아름다운 바람(美風)이 불어가고 대지의 화폭에는 늘 아름다운 그림과 심금을 울리는 한 수의 시가

걸린다.

 

이젠 육십령 까지 왔다.

누가 그러데

육십령 까지오면 대간 일등병 달아 준다고….

난 대간 길을 두 번째 더듬어 가니 이젠 중사쯤 단 셈인가?

 

나의 청춘기부터 무수한 날을 빠대고 댕겼으니 이젠 산에 지치고 물릴 법도 한데

아직도 걸어야 할 길에 대한 기대가 남아 다시 설레이는 나를 본다.

다시 걷는 길

황량한 계절의 길목에서 어둠 속에 남겨두었던 그 길을 걸으며 다시 조용히 밀려오는 감동의 파도를 만난다.

 

이번 여정은 무령고개에서 영취산에 올라 부드럽게 흘러 가는 산릉을 따라 덕운봉과 깃대봉을 거쳐 육십령으로

간다.

가는 길 내내 멀리서 유장하게 흘러가는 고원 산릉의 멋진 조망이 함께하고 낙엽이 두껍게 깔린 산길에는 떠나는

가을 냄새가 등천했다.

바람결이 차갑긴 해도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능선에 푸르름을 잃지 않은 산죽마저 가득하니  마치 봄 소풍

이라도 나온 듯 발걸음이 저절로 가벼워 진다.

 

이번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영취산의 운해 그리고 덕운봉과 북바위의 후련한 조망 그리고 깃대봉에서 바라보던

할미봉과 그너머 서봉, 남덕유산의 멋진 웅자 였다.

 

그 길을 걷고 나서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잔잔한 감동의 여운이 남는다.

빈약한 필설의 한계다.

지난 번 길을 백두대간의 실크로드라고 했는데 오늘 이 길은 난 한마디로 무어라 규정할까?

이동진은 한편의 영화를 짧은 한마디로 잘도 함축 하던데….

 

황량한 대지의 고독 속에 부드럽게 울려 퍼지던 감미로운 전원 교향곡의 선률 그리고 조용히 떠나는 가을 여자의

아름다운 뒷태

 

 

 

 

댕겨본 서봉과 남덕유산

 

영취산 조망 - 멀리 서봉과 남덕유산 그리고 남령과 월봉산 까지... 

 

건너 뛴 대간 길 400미터 되찾기

 

부전계곡 뒤로 멀리 보이는 황석산

 

 

 

백두대간 6구간(무령고개-영취산-민령-깃대봉-육십령) 12.5km / 2014.11.16 () 날씨 ;맑음

 

경유지별 시간  (5시간 30분소요-)                                 

09:06

무령고개 출발

09:25

영취산

09:33

선바위 고개

09:40

다시 영취산

10::25

덕운봉

10;50

전망바위

11:01

이정표(육십령9km,덕운봉1.2km)

11:21

중간지점이정표(육십령6.5km,영취산6.5km)

11:32

능선식사 ( 20)

12;23

북바위

12:55

민령

13:39

깃대봉(10분간 휴식)

13:55

깃대봉 샘터

14;39

육십령

 

 

 

 

 

 

 

 

 

영취산 (1076m)

나뭇잎 새로 멋진 운해를 바라보며 영취산을 오른다.

산릉 위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갑작스런 태양의 입김이 모처럼 운해를 훌쩍 걷어갈 까봐 조바심 치며 오르는 6번째 대간의 아침이다.

 

오르자 마자  산우들이 무리 지어 있는 표석은 본체 만체하고 운해의 장관부터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는 다시 선바위 고개 까지 되감기

지난 번 영취산에 오르지 않고 선바위고개에서 무령고개로 하산했기 때문에 능선길 400미터를 건너뛴

셈이라 그 길을 연결하고 인증샷을 했다.

요산요주님이 귀연의 대간 공인기록을 정확히 유지하고 있기에 어영부영했다가 혹여 비고란에 “400미터

빼먹었음하고 기록해 버리면 낭패다.

 

영취산은 신령령(), 독수리취()를 쓴다.

영취산은 원래 고대 인도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왕사성(王舍城)의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서 석가가 이곳

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설법했다고 한다.

산의 이름은 산세가 '빼어나다', '신묘하다', 신령스럽다'는 의미인데 이 곳에서 금호남정맥이 분기한다.  

영취산에서 장안산을 지나 주화산 까지 이어지는 금호남정맥은 주화산에서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나누어 진다.

금남정맥은 대둔산과 계룡산을  융기시켜 부여 부소산으로 흐르고 호남정맥은 남서쪽으로 휘돌며 내장산과

추월산 무등산을 일으켜 광양 백운산 까지 치 달린다. 

 

 

 

 

 

 

신갈나무 숲길을 지나고 

 

산죽길도 지난다.

 

낙엽길

 

 

덕운봉 가는 길

날씨 좋고 조망 좋고 산세 좋고 모든 게 다 좋은 멋진 가을날이다.

낙엽과 산죽 그리고 억새 군락이 번갈아 나타나는 산길에는 늦가을의 서정이 펄펄 날렸다.

눈부신 햇살과 원색의 불타는 단풍의 시간이 지나고 이젠 많은 걸 내리고 조금은 쓸쓸하고 고독한 이 갈색의

가을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한다.

사그락 거리는 낙엽밟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이 길이 좋다.

바람 타고 피어 오르는 낙엽 마르는 냄새 말고는 아무런 냄새 날리지 않는 이 길..

 

그리고 솔바람길

 

 

 

파죽지세로 능선을 향해 진군하는 산죽군락 

 

덕운봉 오름길 소나무

 

부전계곡 그리고 멀리 황석산  - 앞쪽 우측 봉우리가 백운산 

 

덕운봉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다 보이는 주변산세가 아니라 모처럼 거침 것 없는 터지는 조망에 마음이 후련해진다.

깊은 골짜기를 따라 멀리 괘관산이 우뚝하고 우리가 걸어온 백운산과 영취산 능선과 멀리 황석산 거망산 까지

한 눈에 들어 온다.

 

 

 

 

덕운봉에서 되돌아 본 백운산과 영취산

 

덕운봉 에서

 

 

 

 

가야 할 능선 길 - 우측 황석산

 

가야할 능선 길 - 멀리 서봉,남덕유  그리고 그 우측으로 남령과 월봉산 

 

 

 

 

민령 가는 길

가지를 모두 털어내고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산 등성이를 걸어간다.

벌써 가을이 떠나갈 모양이다.

불타는 설악의 단풍 숲에 들지도 못하고 가슴 시린 황홀한 고독 속에 버려지지도 못한 채 또 한 해의 가을이

저물어 간다.

세상의 답답함과 그 빌어먹을 조갑증과 궁금증 그런 것 다 떨쳐내고 누군가 나를 찾는 그 거르적거리는 인연조차

모두 끊고 은둔과 고독의 숲에 고립된 채 바람소리만 듣고 싶었는데

 

아들과 산 친구들과 함께 가는 그 길에서는 헐벗은 나목도 빈가지 가득한 황량한 가을 숲도 그렇게 쓸쓸하지

느껴지지 않았다.

생소한 가을이다.

발정난 숫캐처럼 달뜨지 않았던 가을

붉은 단풍의 숲도 걷지 못한 채 고독의 편주에 기대어 상실과 적막의 바다를 흐르는 막막함 마저사라진 이 가을은 ….

어쩔거니 무릉객 ?.

45억년 지구에서 고작 50년도 더 못 살아갈 사람이 이 아쉬운 가을을 이렇게 무성의하게 보내도 되는 건가?

다시 1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이 아까운 가을을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가야할 능선 풍경

 

 

 

 

 

 

지나온 덕운봉

 

 

 

 

 

 

 

 

오늘 구간의 중간지점

 

 

오늘 구간의 중간지점 이정표를 지나 작은 봉우리를 하나  오르자  먼저간 산우들이 길섶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곳에서 산우들과 어울려 식사를 했다.

 

 

 

 

 

 

북바위

 

 

 

북바위는 최고의 조망처 였다.

그곳에서 우린 아이들처럼 즐거웠다.

식사를 한 후 가장 후미로 출발 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많은 산우들이 모여들어 사진을 찍느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간객이면 누구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가히 명품바위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서봉과 남덕유

 

 

 

북바위에서 내려다 본 조망

 

 

 

능선 어느 곳에서나 거침 없는 조망이 살아나고 가을이 떠나는 모습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그대 행복을 위해 어딜 방황하는가?

어제 누군가 흘린 무수한 행복은 육십령 가는 길 위에서 낙엽과 함께 뒹굴고 있거늘……

카르페디엠!

산친구들이여 지금을 즐겨라!

앞으로 함께 가야 할 그 길도 새로운 기대와 흥분이 가득한 멋진 길이겠지만 이렇게 낭만적이고 부드러운

길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니….

 

.

 

낙엽길

 

민령 가는 길

 

 

 

 

 

 

 

민령

 

 

민령 소나무 아래 휴식

 

 

민령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억새 숲

그 옛날 어둠 속에서 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 길을 걸었다.

북바위를 지나고 부터 햇빛은 구름 뒤로 숨었다.

길이 부드러워 힘이 들지도 않는데 소나무 아래 아들과 잠시 배낭을 내렸다.

무수한 대간객들이 쉬어 갔을 그 소나무 아래

 

갈기를 날려버린 억새 숲 그리고 헐벗은 나무와 뒹구는 낙엽이 보여주는 황량한 풍경 위에 걸터앉은 게 어디

쇠락과 고독만이겠는가?

모든 걸 내리고 모든걸 비운 채 묵묵한 기다림으로 새날을 준비하는 거긴 안식과 평화와 새봄의 희망이 함께

누워 있다.

 

 

 

 

 

 

 

 

 

 

 

 

 

깃대봉 가는 길

갈기를 바람에 훨훨 날린 채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는 억새 숲 길이다.  

바람 길에 억새가 엎드려 운다.

숨죽여 울음 우는 억새 숲에서 나는 켜켜이 묵혀둔 마음의 찌꺼기를 한 풀 바람에 날린다.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조용한 억새의 울음은 외로움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억새는 울고 있는 게 아니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채움은 곧 비워져야 할 운명이고 비움은 다시 채워져야 할 희망과 기쁨임을 억새는 바람에 쉬어버린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이다.

 

이제 12년전 어둠 속에 남겨 두었던 길의 그림이 그려진다.

영취산에서 부터 끊임없이  이어지던 산죽 길과 민령에서 깃대봉 가는 길의 억새 숲

간밤에 태풍 매미가 지났다

마치 엄청난 폭우가 지난 뒤의 산행처럼 그 길의 산죽과 억새는 온통 빗물을 머금고 있었다..

발에 걸리는 억새에서 쏟아오는 이슬이 등산화로 가득 스며들어  산행길 내내 개구리 울음소리를 냈다.

청산님과 청계님 그리고 정암님이 번갈아 선두에 서서 사상 초유의 억새길 러셀을 하느라 무척 고생한 끝에 결국

과도한 체력소모로 하반신이 흠뻑 젖은 채 뒤로 물러났다.

그날 대간은 백운산 까지 내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깃대봉 오름 길에 되돌아 본   지나 온 능선

 

깃대봉 오름 길 우측 풍경 

 

 

 

깃대봉

 

 

깃대봉

어둠에 묻어 두었던 봉우리다.

간밤의 쏟아낸 빗물을 채 떨어뜨리지 못한 풀잎과 나뭇잎을 헤치며 달빛아래 은실처럼 빛나던 능선의 실루엣을

따라 깃대봉에 올랐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깃대봉에서 민령을 향해 내려가다가 우린 올라 오던 반가운 불 빛을 만났다.

이 야심한 밤에 또 우리처럼 또 잠 못 드는 사람들이 있구나!”

 

으헉! 뭔일이래 ?”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따라 나선 길

의욕만 앞서서 몇 시간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길을 나선 그 날

이마에 등불을 밝히고 새똥빠지게 깃대봉을 올라오던 우리 팀의 후미를 만나 달빛아래 두 눈을 똥그랗게 떴던

그날 위로 벌써 12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오늘 산행의 가장 큰 성과와 의미는 밝은 깃대봉에 서서 애잔한 할미봉과 그 너머 위풍당당한 서봉과 남덕유의

모습을 바라보고  어둠 속에 잃어 버렸던 육십령- 영취산 간 능선의 아름다운 백두대간 풍경을 다시 되찾았다는 거

 

 

 

 

 

 

 

근데 뜽금없는 구시봉 이름에 웬노무 거대한 표석?

산림청 가관이다.

오는 길에 이정표도 하나도 바꿔 놓지 않고 도저히 납득이 어려운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표석 뒤에 새겨놓고

깃대봉을 난데 없는 구시봉이라 부르란다.

어느 풍수가가 구시형처럼 생겼다 말 한마디 했다는 궁색한 이유로….

도대체 구시란 말이 뭔 의미인데?

나처럼 이렇게 구시렁 댄다는 뜻 말고 또 다른 무슨 뜻이 있는데…?

남의 좋은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막 바꾸어도 좋은가?

가딩을 고딩이라 부르고 한라산님을 보문산님으로 부르면 좋은가?

말뚜기님를 메뚜기님이라 부르고 산골타잔을 시골치타라 부르면 좋냐는 말이다.

 

싫다. 산림청 ..

난 동의 할 수 없다.

난 그냥 정든 깃대봉 이름이 좋다.

 

 

 

 

 

깃대봉 에서

 

가까이 다가 선 할미봉 그리고 그 너머 서봉과 남덕유

 

 

철조망 통과

 

흡사 철조망 같은 나무 덤불

 

해도 너무 함 - 소백산 고치샘  표절한 문구....

 

 

물맛 둏타

 

 

 

황량한 신갈나무 숲

 

산허리 오솔길

 

 

 

육십령으로 내려가는 산길

 

길주의 : 육십령 휴게소 방향이 아니라 대간길로 직직해야 함

 

여기서 남덕유산 8km  - 육십령 하산길에 나부끼는 귀연 표지기   

 

육십령 게단으로 내려서기 직전  무덤 

 

육십령 휴게소로 내려가는 계단길

 

모여서 뒤풀이를 즐기는 대원들

 

 

육십령

우리는 조용히 육십령으로 내려섰다.

2003 9 14일 새벽 1 30

태풍 매미가 지난 육십령 하늘은 오히려 청명했다.

육십령에서 대간을 오르는 길에는 부러진 나무 가지와 등산로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나무가 흘린 피의

향기가  조용한 새벽공기 아래 떠돌고 있었다.

강원도 산간에서 겨울로 가던 길목에 만났던 쏟아질 것 같은 무수한 별들을 다시 만난 그날 우리는 육십령에서

복성이재 까지 14시간을 걸었다.

 

그 옛날 안의 감영 그리고 장수 감영에서 60(24km)라 육십령

육십령을 넘기 위해 크고 작은 고개 60개를 넘어야 하는 육십령

산적이 많아 함부로 넘지 못하고 60명이 모일 때까지 주막에서 한 없이 기다려야 했다는 육십령.

거대한 쇼핑센터에 그 옛날 영화를 내어주는 재래시장처럼 차적과 인적이 드문 육십령은 멀리 대진고속도로를

쓸쓸히 바라보며 힘 없는 할미봉을 원망하고 있다.

흐르는 세월이 가져다 준 무심한 변화로 이제 산꾼들의 주막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육십령에는 최고로 맛 있는

소머리 수육과 뜨거운 소머리 탕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맥주잔 가득 정이 넘치고 산친구들의 유쾌한 웃음이 하늘

가득 떠돌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 육십령 고갯길

                                                   가야 할 길에는 할미봉만 우뚝하고

                                                   해는 저물어 가는데

                                                   그 옛날 내가 흘러간 길 따라

                                                   고개를 내려서는 이 없다

                                                   지난 세월은 아득해도 추억은 남고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도 산들은 떠남이 없는 육십령

                                                   구비구비 고갯길 따라 세월은 가고.

                                                   할미봉에 할미꽃도 다시 피련만

                                                   흘러간 내 청춘은 돌아 올 생각이 없다.

 

 

 

 

 

 

 

 

 

 

 

 

 

 

 

 

 

으로 가는 길 - 동호정을 탐방하다.

 

 

 

돌아 오는 길에 동호정에 들렀다.

참으로 수려한 풍광이다.

 

육십령에서 동쪽 함양군 안으면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화림동 계곡이 있다.

그 계곡을 따라 농월정,군자정,동호정,거연정 등의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자연이 맑고 깨끗했던 시절 무수한

학자들과 시인 묵객이 음풍농월에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

 

 

 

 

 

 

 

 

 

 

 

 

장수는 산과 계곡이 깊어 대대로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2(), 3(), 5()’라 하여 열 분을

장수를 빛낸 인물로 기리고 있다.

 

2(),

2덕은 방촌(尨村) 황희(黃喜·1363-1452)와 정신재(靜愼齋) 백장(白莊·1342-1418)을 말한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정승으로 칭송받았던 황희정승은  장수읍 선창리의 창계서원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에게 학문을 익힌 백장은 삼은(三隱)에 버금가는 성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에서 은거하며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3(),

3절은 의암 주논개(朱論介·1574-1593),충복(忠僕) 정경손(鄭敬孫), 순의리(殉義吏) 백씨(白氏)를 말한다.

 

주 논개는 백두대간 서쪽 기슭에서 태어나 동쪽 기슭에 묻혔다.

모진 운명의 가련한 여인이었지만 정절의 표상이 아니라 충절의 귀감으로 추앙된다

논개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인 의암사(義岩祀). 1956년에 건립되었고 진주 촉석루아래

남강 변에는  논개가 몸을 던진 의암이 있다.

 

 

 

 

 

 

논개 설화

논개는 1574년 영취산 북쪽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논개가 13세 되던 해 부친 주문달이 세상을 떠나자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숙부 주달무는 당시 장수의 토호

김풍헌에게 논개를 팔았다.

결국 갈 곳이 없어진 모녀는 현감인 최경희의 부인의 병수발을 하면서 현감댁에 머물렀는데 현감 부인이

세상을 뜨고 난 후에 논개는 최경희의 후처가 되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된 최경희는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함락당하자 진주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논개는 승전 축하잔치를 연 왜군 틈에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

(毛谷村六助)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했다.

 

 

 

 

 

 

논개 생가 마을

 

 

또 한 분의 3절 정경손은 장수향교가 지금까지 무사히 전해오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남원성을 침공하고 북상 중 장수향교를 불태우려 했다. 당시 향교지기였던 정경손은

향교 마당 한가운데 꿇어앉아 경전을 외우며 의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성전이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침범하려거든 내 목을 먼저 베고 가라!” 이 기개에 감복한 왜군은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라 쓴 쪽지를 남기고 물러났다.

향교 앞에 이 분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마지막 장수 3절 백씨는 고을 현감을 모시고가다 현감이 말에 떨어져 죽자 자신도 같이 목숨을 버린 인물로서

타루공원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장수 현감 조종면이 관내 순찰 중 암벽으로 된 비탈길을 가다 길 옆 풀밭에서 놀란 꿩이 갑자기 날아 오르자

현감이 타고 가던 말도 덩달아 놀라 뛰었다.

그만 현감과 말은 균형을 잃고 암벽 아래 소에 빠져 죽었다.

그러자 현감을 모시며 말을 몰던 배리(白氏라고 전함)는 경황 중에 정신을 가다듬고 손가락을 깨물어 암벽에다

의 형용을 그려놓고 옆에다 타루(墮淚 글자를 쓴 다음 대성통곡하고 소에 빠져 죽었다 한다.

기이한 일은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길 때 타루비에서 눈물 같은 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5(5)

다음으로 5의는 백용성(白龍城·1864-1940)조사, 전재(健齋) 정인승(鄭寅承·1897-1986) 박사, 그리고 의병대장인

전해산(全海山·1879-1910)·문태서(文泰西·1880-1913)·박춘실(朴春實·1875-1914)을 말한다

 

백용성은 1919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 활동하였고, 불교의 대중화·생활화·지성화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제의 친일 불교화정책에 저항하였다

번암면 죽림리에 있는 죽림정사는 그의 생가다.

 

전재 정인승박사는.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일생을 바친 애국지사이자 한글학자이다.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계북면 생가 근처에 정인승 기념관 건립했다.

 

전해산 의병장은 이웃 임실 출신의 유학자. 1908년 고종의 밀조를 받아 대동창의단을 구성했고, 노획한 무기로

전남 중서부 지방을 장악한 후 전북 장수에서 거병 준비하다 체포돼 1910년 사형 당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수천의 군중이 모여 의병장의 장례를 치를 때 장군의 상여가 집 앞 냇가를 건너가자 의병장 부인 김해김씨는 방으로

들어가 음독자결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의병장의 유해는 다시 냇가를 건너왔고, 부인과 함께 쌍상여로 장례를 치르니, 충신열녀를 보내는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한다.

번암면 원촌 마을에 의병장 부부의 묘소가 있고, 번암중학교 앞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문태서 의병장은 1908년 고향인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근거로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활약한 인물.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으나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당하였다.

장수 출신인 박춘실 의병장은 을사늑약 이후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무주·진안·장수 등지에서 60여 차례의 교전을

벌이며 일본군 3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1909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4

대구 형무소 벽을 부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계북면 양악리 입구 도로변에 문태서·박춘실 두 분 의병장을 기리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금강 발원지 뜬봉샘)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588

   금강의 첫 물줄기가 솟아오른 곳, 그래서 마을 이름 역시수분이다. 옛 어른들은 그래서 이곳을물뿌랭이

   라고도 불렀다.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은 신무산(해발 896.8m)이라는 이 마을의 뒷산 정상 조금 못 미치는 곳에 있다

   이 샘이뜬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조선의 건국과 관련되어 있다. 신무산은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얻기

   위해 계시를 기다리던 산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곳에서 창공으로 솟아오른 봉황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봉황이

   날아오른 곳에 있는 샘이라고 해서뜬봉 샘(飛鳳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