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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친구와 광교산




수원행

 

이 봄에는 들고 산으로 가는 길을 코로나가 막아서더니

누려야 할 멋진 봄날은 세월에 멍든 아픈 가슴이 거두어 가더리….

 

황혼 길에는

함께 저무는 길을 걸어갈 친구 하나와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빈 마음 하나면 족하련만

늙으막에도 꾸역꾸역 솟아 오르는 노욕이

머지않아 이슬처럼 사라질 이 눈부신 봄날 조차 가슴에 담지 못하게 한다..

 

 

갑작스런 삶의 변화로 인해 미음이 울적한 엄하사가 대전에 오려 했는데….

내가 올라 가마 했다.

거기 머물 곳도 있고….

난 아직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10년도 넘은 젊은 날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수원으로 가는데  

카톡이 온다.

 

까톡~~

 

오늘이 점심 메뉴

콩밥

간장새우 호박조림

양념 고기 볶음 & 영양상추

미역국

 

그리고 요리하면서 찍은 사진















답툭~~

 

~~~

 



이건 친구가 누리기에는 너무 과분한 호사가 아닌가?

남편 퇴근을 기다리는 부인의 정성이 가득한 사랑의 식탁 같은....


때깔과 정성은 훌륭하네만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해서

그냥 담담한 마음으로 가는 중일세….

 

 




도착과 함께 준비된 점심식단…


엄중한 시국이고 부인이 외유증인 집이라

난데 없는 엄쉐프의 야심찬 집 밥을 맛보는 호사를 누린다.

 

어라

근데 맛은 때깔보다 더 근사하다.

가볍게 점심 식사를 하고 광교산 산책을 한다는 풍신이 위장의 용적을 초과해서

120%까지 부풀려 채워 버렸다.

뒷동산 산책길이라 했고 엄하사의 전투력은 익히 알고 있으니……

 




식사후 광교산 산책 가는 길 능수 벚꽃




하늘은 드 맑고 공기는 청명한  때는 바야흐로 꽃피는 춘 사월 호시절...




도시의 길을 가로질러 광교산 가는 길


 



한남정맥 주유할 걸었는데 광교산 어느 코스를 걸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들머리가 지지대 근처 지능선 같은데 산길에는 인적이 뜸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주었다.

발이 편한 완만한 경사의 흙 길이라 편안한데 배가 너무 부르고 몸이 풀리지 않은 탓에 초장부터

스퍼트하는 엄하사를 따라 가느라 힘들디.

 

작년 10월에 만나고 이런저러한 이유로 몇 번의 모임이 무산되었는데 

지난 5개월 동안 뭔 일이 있었던 건가?

엄하사의 체력은 몰라보게  일취월장했다.

그렇게 낙차가 큰 산 길은 아니지만 나의 평상 산행속도를 능가하는 속력으로 시종 앞에서 빠르게 진행 했다

흡사 이기자 졸병 시절 비장한 각오로 훈련에 임하던 것처럼….


몸에 열기가 오르자 지지대 능선 교차점에서 자켓을 벗고 행장을 가볍게 하다.

 





어딘지 낯 익은 광교산 헬기장 

잠시 다리쉼을 하고 휴식을 취한다.…








가파른 계단  오르막을 따라 광교산 정상 가는 길 





오름길 중간 전망대







산불이 있었던 듯  

휘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정상 가는 길







멀리 호수 옆  광교산 공원이 있는 날머리가 보인다.








지지대 등산로와 만나는 교차점에서 자켓을 벗느라 잠시 휴식하고

통신탑 헬기장과 그 위 전망대에서 한 번 휴식하고 내쳐 시루봉에 올랐다.

2시간 20분 걸렸다.

평소 엄하사는 2시간 만에 올라 온다고 했으니 오늘은 둘이 함게 하는 바람에 좀 더 시간이 걸린 셈이다.

 

통신탑 이래 헬기장과 시루봉은 한 번 와 본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등산로가 많이 정비되고  

그 때가 너무 오래되어서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짧은 인생길 그리고 너무도 쉽게 바람에 날리는  우리 삶의 기억들......

 








건너다 보이는 백운산 능선






기념사진을 찍고 형제봉 쪽으로 하산의 길을 잡았다.







10년전 산우들과  함께 와본 형제봉











화창한 봄날 진달래가 한창이고 나뭇 가지는 연초록 잎새을 티워 내고 있어 산이 가장 아름다운

날에 그 길을 오랜 친구와 함께 걷는다.

집 안에 박혀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봄날

코로나 비상 시국임에도 등산로는 봄빛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등산객들로 제법 붐빈다.













빠른 속도지만 하산하는 길이라 가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형제봉을 들러 광교공원 쪽으로 하산했다..

시루봉에서 광교공원 회장실 까지는 2시간 걸려서 광교산 환종주는 4시간 20분 소요된 셈이다.

근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집 까지 회귀한다니 ..






광교호 뚝방길을 따라 가는 길.









수변 길이 공사 중이라 능선길을 따르고.









호숫가 수변길을 걸어가다가  .








다리를 건너 도로로 나가다.





도로로 합류되는 지겟길을 따라 집으로 회귀하는 길.




한철약수터와 항아리 화장실을 거쳐 다시.도심으로 어둑해져서야 돌아 왔는데.

산책길로 생각했지만 오후 1시에 시작해서 730분에 마무리된 20km  6시간 30분에 걸친 긴 여정 이었다.

 






우리는 마트에서 회를 떠서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오래도록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4월 4일의 밤은 술잠의 순배와 끊임 없는 이야기 속에 깊어  갔다. 








다음날 4월 5일 일요일



매운탕 아침식사   



 


매운탕으로 아침을 챙겨 먹고 다시 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성 건륭과 율릉을 산책하다.

 












융릉隆陵(추존 장조와 헌경황후)

 

능의 역사

1762(영조 38)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

이라 하였다. 1789(정조 13)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1815(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다.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이야기

장조의황제(재세 : 1735년 음력 1 21 ~ 1762년 음력 윤5 21)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1735(영조 11)에 태어나 1736(영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러나 1749(영조 25)에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벽파 대신들이 왕세자를

모함하여 영조와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특히 1762(영조 38)에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왕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영조는 왕세자를 폐서인 한 후 뒤주에 가두었다.
『영조실록』 1762(영조 38) 5 13일의 기사에는 아버지인 영조가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로부터 임금은 왕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하였다.

임금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에게 휘령전(정성왕후의 혼전)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궁성문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후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왕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정조)이 들어와

관과 포를 벗고 왕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전교를 내려 왕세자의 자결을 재촉하니, 왕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은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군병을 시켜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림 임덕제 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왕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전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왕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왕세자빈,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결국 뒤주에 가둔지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1899(광무 3)에는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종이라 하였다가 곧 바로 황제로 추존되어 장조의황제라

하였다..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이야기

헌경의황후 홍씨(재세 : 1735년 음력 6 18 ~ 1815년 음력 12 15)는 본관이 풍산인 영풍부원군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735(영조 11)에 반송방 외가 사저에서 태어났다. 1744(영조 20)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762(영조 38)에 장조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에 봉해졌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호칭을 높여 혜경궁(惠慶宮)이라 하였다. 헌경의황후의 아버지와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폐세자를 주장하는 노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숙부 홍인한은 심지어 영조가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인

1775(영조 51) 11월에 이른바 ‘삼불필지설’을 내세워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의 대리청정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혜경궁 홍씨는 왕세자의 참변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후 1795(정조 19) 친정 조카 홍수영의 소청에 의해 장조의 참변을 중심으로 한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남겼다.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한중록』은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을 하다가 1815(순조 15)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건릉健陵(정조와 효의황후) 

능의 역사

1800년(정조 24)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장조의 현륭원(융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건릉 불길론이 있었고, 1821년(순조 21)에 효의선황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건릉 천장이 결정되었다. 이후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면서 합장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이야기

정조선황제(재세 :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7일, 재위 : 1776년 음력 3월 10일

 ~ 1800년 음력 6월 27일)는 추존 장조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762년(영조 38)에 아버지 장조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을 겪었다.

1762년에 영조는 정조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일찍 세상을 뜬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부터는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먼저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노력하였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를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 설치, 신해통공

(금난전권 폐지 등) 실시,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임진자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고, 『증보동국문헌비고』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론이 중시되는

학문에 치우치지 않고,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다. 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을 공포하고, 제도 개편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1800년(정조 24)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올렸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정조선황제로 추존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의 원(영우원)을 지금의 자리인 현륭원(융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정조 14)에서 1795년(정조 19)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1796년(정조 20)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

(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행궁으로 고쳐 지은 후에도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이야기

효의선황후 김씨(재세 : 1753년 음력 12월 13일 ~ 1821년 음력 3월 9일) 본관이 청풍인 청원부원군

김시묵과 당성부부인 홍씨의 딸로 1753년(영조 29)에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에

왕세손빈으로 책봉되었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정순왕후 김씨와 헌경의황후 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어 수차례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신 것이 마음속에 지통으로 남아 있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하며 모두 거절하였고, 1820년(순조 20)에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 후 1821년(순조 21)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의선황후는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을 수 없어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타고난 덕망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순조실록』에

실린 효의선황후의 행장에는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랫사람을 반드시 성의와 신의로써

대하여 일찍이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고 얼굴을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적인 은정으로 봐주지 않았으므로, 좌우에 있는 궁중의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알았다. 친척 중에 과실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꾸짖지는 않았으나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였으므로, 그 사람이 “마음에 부끄럽고 송구하여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하다.”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봉양에 매우 검소하여 복식과 기물이 하나도 좋은 것이 없었고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것만 취할 뿐이었다. 평소의 반찬이 더러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좌우에서 담당자를 치죄할

것을 청할 경우 “어찌 구복(口腹) 때문에 사람을 치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산책을 마치고 늦은 소고기 무국으로 점심을 함께하고 58분 열차로 돌아오다.



길을 걷다 보면 폭풍우도 만나고 무서리와 눈보라도 만나기도 하지만....

해 저무는 황혼길에 만나는 거친 벼랑과  남은 먼길은 더 외롭고 힘들 것이지만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난 상처는 시간이 아물게 하고 

다시 걸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길은  거친 세월의 파고를 넘으며 잘 살아온  자신과  

그 동안 쌓아 온 삶의 내공이  인도하려니....

 

마음이 여유가 없을 텐데 준비해준 성찬 고마웠네

친구가 힘든 시간을 잘 보내고 다시 의욕에 넘치는 날들로 되돌아 갈 수 있으리라 믿네

열심히 일하고 ,운동하고

또 잃어버린 마음의 고요를 되 찾으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이네

건강하게 다시 만나세….

 


ps)

돌아와 블로그를 검색해보니 광교산은 지금으로부터 10년전 2012318일에 올랐었다.

한남정맥 5구간 종주길이었고  오늘 구간의 역방향으로 삼곡마을 힐슽이트 아파트에서 형제봉과

시루봉에 올랐다가 지지대 능선으로 하산했는데 총 22km 8시간 여정중 광교산코스는 5시간 걸렸다.



추억의 사진첩  (2012년 3월 사진 .)








지지대 고개  뒷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