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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가을 새벽 순례 - 대둔산

 

 

 

새벽에 떠나기 위해 거창한 준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굳이 잠을 설칠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 이마에 불꽁무니 하나 달고 새벽 들창을

열어 젖히면 되는 거지요

그냥 배낭을 메고 아침 운동을 하듯 나서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둠이 부드러운 손길로 잠이 덜 깬 얼굴을 감싸고 새벽의 적막과 고요가

잠시 소란스러웠던 가슴에 다시 묵상과 평화를 돌려 줍니다.

아니 그 길의 끝까지 마음은 새벽처럼 고요하고 가슴엔 계절의 풍요와 기쁨이 차오릅니다.

올해는 조금 늦었습니다.

짧은 가을날 그 아픈 가슴의 목마름으로 담아 내야 하는 가을 서정은 늘 시리고

그렇게 애틋해서 내 영혼은 늘 더 먼 곳

더 깊은 가을의 심연을 유영하기 바빴습니다.

 

대둔의 가을을 잊을리가요?

이미 선상의 붉은 단풍들은 다 낙엽으로 날리어 갔음을 알고 있지만

그 만추의 쓸쓸합과 허허로움이 주는 역설적인 충만함과 따뜻함도 이미 알고 있는데….

 

다다를 수 없는 별의 꿈이 더 아름답게 빛나는 가을이지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 가을에 감사 해야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떠날 수 있는 이 차가운 새벽이 내겐 축복 입니다.

늘 손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권태롭지 않은 여인

대자연의 변화를 누리는 것 만으로도 삶의 한 조각은 충분히 익사이팅한 모험 입니다.

 

어둠 속에서 카메라의 눈으로 확인하는 단풍의 빛깔이 아직 아름답습니다.

이 가을엔 내 오줌 줄기 보다도 더 가늘어진 수락폭포의 물줄기도 그렇게 

서글퍼 보이지 않았습니다.

능선에서 갑자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만나는 것도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그 수려한 풍경이 아직 어둠의 휘장에 가리워 있어도

딱히 문제될 건 없습니다.

시간은 더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준비하느라 더 바쁠 겁니다

 

난 어둠의 베일이 드리운 산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어둠에 공명하는 고요와 적막의 웅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 목덜미를 간지르는 가을 여인의 숨결을 느끼고

어둠 속에 흩날리는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이 시간이 그냥 좋습니다.

익숙함은 때로는 무료와 권태를 불러 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새벽 길은 시각 대신 다른 감각들을 미세하게 조율하여

세상에서 굳게  닫힌 마음의 문마저  슬며시 열리게  합니다,

 

 

한 번도 새벽 길을 떠나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새벽의 충만함을 알지 못하고

처움 새벽 길을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가지 않는 적막한 그 길을 두려워 합니다.

그리고 두 번 , 세 번

새벽 길이 일상이 되고 나면 자꾸 새벽에 떠나고 싶어질 겁니다.

혼자 누리는 황홀한 새벽은 중독 같습니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성과 오감을 증폭시키는데  가을이면 

그렇게  계절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자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 집니다.

 

그리고 그 익숙한 어둠이 더 멀고 더 높은 길을 꿈꾸게 합니다.

수 많은 날 막막한 어둠 앞에 서고

수 많은 새벽 길의 아름다움이 마음을 흔들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혼곤히 기쁨으로 다시 깨어나 삶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길 위에 뒹구는 행복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대둔 가는 길은 언제나 나 홀로 였지만 그 새벽 길의 반환점에는 늘 누군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천대 지난 서쪽 암봉에는 달팽이 집이 하나 지어져 있고

아침해가 떠오르는 마천대에는 광주에서 온 두 여자산님이 나보다 먼저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람시계처럼 정확하게 해 뜨는 시간에 도착했고 순서대로 대둔의 성벽들이 붉은

아침햇살로 물드는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붉은 파도를 타며 대둔의 가을 바다를 유영했습니다.

낙조대 까지 절벽을 오르내리며 가을과 함께 물들고 나서

새벽 길은 다시 아름다운 상념이 되고 비로소 나는 가을 여인을 떠내 보낼

준비가 되었습니다.

 

가을정원을 여유롭게 산책하고 낙조대로 돌아내리니 시간은 겨우 945분 입니다.

520분에 출발했으니 가을 여행은 4시간 30분 걸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구만리에 잠시 들려 물빛에 비친 가을을 감상하고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죽이 잘 맞는 나만 데리고 떠났던 낭만적인 아침 산책이었습니다.

 

                                                                                       2022116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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