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에 간다.
오늘은 혼자 산에 간다.
왜 혼자 가는가?
동행이 없어서 ?
혼자 있고 싶어서?
많은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변해갔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낡아가고 늙어 간다.
그런데 나는 내가 늙어가는 걸 알지 못하겠다.
나는 예전처럼 일을 하고 예전처럼 산에 간다.
예전처럼 마음이 동하면 떠나고 가고 싶은 곳이면 장소와 동행에 구애 받지 않고 떠난다.
내 젊은 날처럼 내 가슴은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에 흔들리고 새벽과 그리움에 공명한다.
더 넓은 세상을 꿈꾸지만 시간과 여건의 제약으로 갈 수 없는 나라의 아쉬움에 젖으며 사는 것도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누구에게도 함께 가자는 통발을 넣지 않았다.
혼자 떠나고 싶은 날이 있다..
허기사 새벽 4시에 출발하자고 하면 다들 손사례를 칠 것이다.
오늘은 민주지산에 오르고 싶고 산을 내려와서 어머니와 점심을 함께 해야 한다.
외롭지 않음을 확인하기 위해 산에 가는 건 아니다.
살다 보면 가끔 그리움이 밀려 온다.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고 떠나간 친구에 대한
그렇다.
우리가 밝고 지나간 시간의 추억과 감동을 기억하는 건
메마르지 않는 나의 가슴과 세월과 더불어 늙어 가지 않는 산 뿐이다.
거기 친구가 있고 젊은 날의 내 전설이 떠돌고 있다
잠드신 어머님을 확인하고 조용히 문을 밀고 나온 시간이 정확히 새벽 4시
1시간 30분 걸려 물한계곡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걸어 올라가는 게 길어 등산로를 거슬러 올라가 입구에 차를 대다.
길 위에는 아무도 없고 계곡은 시끄러운 물소리를 낸다.
객지를 떠돌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기분이 이런 걸까?
변함 없는 익숙한 풍경과 익숙한 소리가 여명 속에서 반색을 한다.
늘 그렇듯이 코 끝으로 청명한 공기를 느끼 엷게 산 안개가 깔리는 새벽 길을 홀로 걷는 건
잃어버린 소풍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것은 도시인이 느낄 수 있는 호사스런 낭만이고 내 안으로 가는 고요한 여행이다..
민주지산은 참 만만한 산이다.
내 사는 곳 가까이에서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숲을 품고 있는 큰 산으로 특히 겨울의 설경은
자못 웅장하다.
가슴이 우는 날에 새벽 길을 열면 5시간 30분 뻐근한 산행을 즐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오후
일정을 진행 할 수 있다.
잠을 줄여 출발 시간만 조절하면 새벽 일출도 만날 수 있고 점심 약속이나 애경사에도 늦지
않을 수 있다.
심심한 길처럼 마음 또한 무심해 지는 길이다.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 평온한 상태가 행복이라고 하듯이 조금은 무료하고 무심한 이
시간이 삶의 고뇌와 번민으로부터 돌려 받은 자유의 시간이다.
너무 많은 시간을 잃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리석게도 그 시간을 아까워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늙어오지 않았는가?
황금의 숲으로 친구가 마중 나왔다.
오늘도 지각이네 !
늘 바쁜 마음으로 서두르다 보면 이곳에서 새 아침의 전령을 만난다 .
고요한 돌길 숲 사이로 떨어지는 황금빛 붉은 햇살 .
내게 숲은 늘 휴식이고 마음의 평화 였지.
오늘은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 남은 젊음의 귀퉁이를 그리도 빨리 먹어 치우는 세월인 걸 .
민주지산의 일출은 하도 많이 보아서 1시간 잠 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능선 벤취에 앉아 있는데 부부인지 연인인지 내려왔다.
내가 물었다.
“해돋이 보았어요?”
남자가 대답했다.
“예. 너무 좋은 날이네요 !.”
그들이 지나가고 상기된 표정의 젊은 여자 둘이 내려왔다.
“허허! 요즘 젊은이들은 잠들도 없어요?”
그들이 웃는다.
노땅들은 이제 새벽산에서도 젊은이들한테 밀리는 모양새다.
내가 그들에게 또 물었다.
“해돋이 어땠어요 ?”
“정말 이뻤어요 !
운해도 환상적이었구요..”
아직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들뜬 목소리로 한 여자가 말했고 또 한 여자는 옆에서 웃었다.
보고 싶은 풍경과 활기찬 사람들의 미소를 만나는 행복한 아침이다.
기쁨에 찬 여자의 모습은 더 이뻐 보이는 법이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서울이란댜
서울에서 내려와 이향의 밤을 보내고 새벽 6시 30분 민주지산 정상 해돋이를 만나는 젊고
뜨거운 가슴들…!
그 열정은 이미 정상에 오른 순간 부터 감동에 겨웠을 것이다.
이마에 반디등을 달고 새벽 4시30분부터 어둠의 휘장을 걷어 내면서
둘은 더 진한 우정과 은밀한 산의 신뢰와 평화를 누렸으리라 .
부러웠냐고 ?
아니다.
나도 그러 시절을 지나 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걸 .
다만 그들이 참으로 멋진 날을 만났을 것이랴 생각이 들었다.
젊음과 친구와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누리는 깊고 넓은 세상
그리고 혼곤한 나의 기쁨
오늘은 오랜 친구를 만나고 싶은 날이다.
5시 40분 출발.
6시 58분 붉은 태양 친구 만남
쪽새골삼거리 7시 11분
또 한 반가운 친구가 온다
바람
나를 기다리고 있었군 친구 !
안녕 !
참으로 상쾌한 아침이야 !
이젠 아무도 없는 정상에 올랐다.
찬란하게 떠올랐다던 아침 해는 얇은 구름의 휘장속에서 눈부시지 않은 은은한 빛으로
혼자인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
반가운 표석을 다시 만났다.
“잘 있었나 친구 ! “
변함없는 그 친구의 얼굴도 한 컷 담고.
운해가 감싸 안은 웅혼한 민주 세상을 감상하며 동서남북 사위를 돌아가며 절을 올렸다.
민주지산은 9년전 아들과 백두대간 종주길에 오르기 전 먼저 올라 산신령님께 무사 산행을
기원했던 곳이다.
그 때 술 한 잔 부어 드리고 4배를 올렸다.
ㅎㅎ
그 후로도 친구들과 몇 번을 올랐어도 무사히 완주하고 인사를 올리지 않았으니
오늘 비로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셈이다.
아무도 없는 고봉.
후련한 산 세상.
막힘없는 사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윈하다 못해 춥다 .
자켓을 꺼내입고 준비해간 아침을 먹었다.
석기봉
무녕무상. 무장무애.
세월은 참 많이도 흘렀다.
세상과 세월의 폭정과 횡포속에서 난 잘 살았는가 ?
그려 !
아직 주눅들지 않고 가위 눌리지 않았네ᆞ
아직 까지는 !
차츰 나의 기세는 꺾이고
승리를 자신하는 그 넘들은 점점 의기 양양 해 질지도 모르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어느결에 흘러간 세월의 물살이 어느 날인가부터 더 빨라지면
그 물살의 한가운데서 현기증이 심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릴 것이다
좋아 질 것이 별로 없는 남은 세월 아닌가?
삶의 외곽으로 밀려나고 건강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라
참 우스운 일이다.
그 옛날 가진 것 없이도 행복했던 우리는 더 많이 가지고도 행복할 수 없고
단조로룬 일상과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행복한 노년의 꿈을 꾸던
우리는 정작 그날이 왔음에도 그 여유를 즐기지 못하며 그 자유에 가위 눌리고 있다는 게.
살아온 날 보다 살 날이 더 많지 않고 등짐도 많이 내렸는데 무슨 걱정 그리 많은가?
내일은 비가 올지언정 오늘은 맑지 않은가?
어짜피 흘러 갈 세월 인걸 안달 복달 해서 세월보다 먼저 늙어갈 이유는 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한 세상 잘 누리다 가면 되는 거지
세월의 물살을 거스르려 애쓰지 말고 물 따라 흐르며 강둑의 풍경을 즐길 일이다.
아무도 없는 석기봉에서 홀로 바람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삼도봉의
길을 잡았다.
삼도봉 가는 길에도 사람의 발자취는 없다.
흡사 내 정원 같은 넉넉한 마음이 드는 고요하고 호젓한 길
삼도봉
다시 삼도봉에 섰다.
그 옛날 백두대간의 함성이 아직 남아 있는 곳
사위를 돌며 다시 삼배를 드리다.
4시간 이 소요된 나름 거친 길인데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산기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 후에 두 여자 산객이 올라 왔다.
대전에서 왔다는데 나와는 반대병향으로 산행을 진행하는 중이다.
오늘은 여자들의 기세가 강한 날이다.
덕분에 정상 사진 한 장을 찍고 바람의 속도로 하산을 서두르다.
거리 계산을 잘못해서 알탕소를 자나 쳤다.
개울을 건너고 철책이 나타나서 계곡으로 내려 가는 길이 막혔다.
그런데 계곡 반대편 숲길로 난 쪽문이 열려 있어 그 길로 하산을 하는데 그 아래 계곡이
자못 웅장하고 커다란 소에는 시퍼런 물이 넘실거린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계곡의 풍경이다.
맑고도 푸른 불 빛으로도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견물생심이라
땀이 그다지 나지 않았음에도 푸른 소로 뛰어 들다.
내게 알탕이란 마음이 동해서 떠나는 순례길의 마무리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백두대간의 기운을 받아 혈기 방장해진데다 청수로 마음과 몸의 진폐까지
말끔히 씻어 내니 정신은 맑아 지고 기분은 더욱 상쾌해졌다.
목욕재개 하고 반대편 작을 길을 따라 하산 했다.
마을 쪽으로 이어지는 한적하고도 울창한 숲 길이다.
그 아래 시원한 한 바람이 술술 지나 다니고 숲 사이로 건너편 등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바라다 보인다.
그리 많이 왔음에도 계곡 건너편에 한적한 숲 길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철책에 열려 있는 쪽문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그 길의 존재를 알아 차리지
못했을 길이다.
5시간 30분의 산행을 여유롭게 마무리하고 예정보다 다소 늦게 12시 30분 까지 어머님
댁으로 돌아와 벌써 도착해 있는 동생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다.
저녁에는 동생이 다운 받은 영화 비공식작전을 보았다.
내게는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네플릭스 오징어게임 보다 더 재미 있었다.
모든 게 재미 있었던 날
2023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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