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붕- 아버지 소천
2009년 8월 14일 (금)
아버님 영면 : 2009년 6월 24일 (음력)/ 양력 2009년 8월 14일
삶과 죽음은 등을 맞대고 있다.
보광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엊그제 어머니와 갔을 때만 해도 완전히 회복하신 듯한 아버님 상태가 오늘 갑자기
나빠지셨단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회사에 이야기하고 어머님 모시고 병원으로 갔다.
손이 다시 붓고 있고 한 눈에도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인다.
인공 호흡기를 한 채 호흡을 힘들어 하신다.
수술 후유증으로 패혈증이 진행되는 듯 한데 의사가 큰 병원으로 옮길지를 묻는다.
지금 상황으로는 종합병원에 옮겨도 뾰족한 대책이 없단다.
재 수술은 어려울 거고 다시 응급실에서 검사를 받은 후 중환자실에 들어가실 거라 했다.
다만 온 지 얼마 안되어 여기서 돌아가시면 가족들이 서운하고 아쉬울 수도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러신다.
“너희들 할 만큼 했다.
이젠 더 힘들게 하지 말고 여기서 편하게 보내 드리자”
형에게 전화를 했더니 제주도에서 전화를 받는다.
지난번 상태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난 모양이다.
형은 늘 필요할 때는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
영숙과도 상의를 했다.
영숙의 의견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다.
그냥 의사 선생님께 맡기겠노라고 했다.
최대한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진통제나 많이 놓아 주시고 …
의사는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상황이 더 악화되면 연락을 주겠노라고 하는데 불러도 대답 없이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님을 놓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침 10시에 의사 선생님의 회진 후 소견을 듣고 가기로 했다.
회진 후 의사선생은 아침 보다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다고 했다.
보호자는 가지 말고 대기하라고 한다.
아침도 못 먹은 터라 어머님을 모시고 식사하라 나왔다.
피로에 퉁퉁 부으신 입술이 아프신 어머님은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으셨다.
식사를 하시면서도 탄식을 하신다.
“ 세상이 뭐 이러나…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산 사람은 또 먹어야 하니... ”
혹시 몰라 돌아가시면 아버님 입힐 옷을 하나 샀다.
영숙에게 전화가 왔다.
내려 올 필요가 없다고 만류했는데 굳이 내려 오겠단다.
어제 꿈자리가 뒤숭숭한 걸 보면 오늘 큰 일을 당할 것 같아 불안하고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부랴부랴 연가를 냈다고 했다.
오똑이 같은 아버님이 오늘 당장 돌아가시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살아 오시는 동안 감기 한 번 들지 않았던 걸 자랑 삼으셨고
스트레스가 심하실 때 위험상태 까지 가던 당뇨수치도 평상시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겨울 3일간 실종되었다가 찾았을 때도 원래 부정맥이 있는데 탈진하셔서 돌아가실
수 있다는 의사들의 부정적인 소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하룻밤 자고 거뜬히 일어나셨다.
그 흔한 탈수증세는 고사하고 몸에 붙은 약 줄과 밥줄을 모두 떼어 내고 난동과 행패를
부리시다가 당당히 집으로 돌아 오셨다.
그런 아버님이 오늘 돌아가신다고?
몇 번의 고비에서 늘 강인한 체력을 보이셨던 아버지
형에게만 서둘러 돌아오라 했고 동생들에게는 올 필요 없다고 했다.
땀이 나시면서 호흡이 거칠어 지시기는 한데 아버님은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고 계신다.
영숙이 대전역에 도착했다고 해서 차로 영숙이를 데리고 왔다.
어쩌면 오늘 저녁엔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침보다는 상황이 많이
악화 되었다.
영숙이와 어머님께 아버님을 맡기고 잠시 회사에 들렀다.
도장과 자료 인계하고 지인들 연락처를 가져가기 위해…
막 책상에 않는데 영숙이 전화가 왔다.
전화기에 대고 서럽게 울기만 한다.
맥이 탁 풀렸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허무하게 갈리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그렇게 훌쩍 돌아 가셨다.
허망했다.
그래도 제일 많은 시간을 가까이에서 지켜 왔는데 아버님은 그 한 시간을 기다려 주시
지 않고 가는 길을 서두르셨다.
새벽부터 곁을 지키던 나는 난 바보처럼 아버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영숙과 어머님은 간밤에 불안하여 잠을 설쳤다는데 내겐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우리 아버님은 찬 바람이나 나야 돌아 가시지 그렇게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렇게 철썩 같이 믿었고 한 사람의 죽음이 그렇게 쉽게 찾아오리란 걸 상상하지 못했던
난 그냥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황망하게 아버님 임종을 맞았다.
정신 없이 돌아와 편안하게 눈을 감으신 아버님을 보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떠나시려던 그 고통스런 모습에도 나지 않았던 눈물이 정작 저승으로 혼백이 떠나고
고통 없는 얼굴로 누워계시는 모습에 설움이 복바쳐 올랐다.
아버님 시신을 붙잡고 이제 눈물이 마른 어머님과 누이동생 옆에서 경황없이 떠나 보낸
허망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버님의 얼굴은 아주 좋아 보였다.
비쩍 바른 얼굴과 볼에 살이 오르고 얼굴색도 하앴다.
아버지
참 바보처럼 어처구니 없는 인생을 산 아버지
차라리 잘됐어
그렇지? 잘된거지…?
고통 없이
마음의 아픔도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세월을 타고 그렇게 편안히 사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여겼는데 ...
아버지 !
우리가 돌볼 수 없어 병원에 쓸쓸하게 남겨두었고
그 외로움이 한이 되고 독이 되어 병을 키웠겠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잖아
그렇게라도 잘 사시길 바랬는데….
그 메마른 삶도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씹히는 거
정신이 온전하면 벌써 포기했을 그거
아버지의 복은 거기 까지 였네
큰 호강은 못해도 고생이 끝나고 어머니와 재미있게 살날만 남았었는데 ….
그냥 다행으로 생각해
슬프고 아픈 기억들 세월에 훨훨 날려버리고
모든 세월의 짐은 모두 어머니께 넘겼잖아
아주 오래 건 내일의 꿈과 희망이 날아 올라 하얀 구름이 되고
뒤엉킨 슬픔과 기쁨이 비 되어 강으로 흘러가고 나서도
병으로 더 많은 고통을 당하지 않고 자식들 힘들게 안 했잖아
이젠 고통 없는 곳에서 고단함 내리고 편안히 쉬어 …
그리고 아버지 잘 못 만나 고생만 한 어머니 좀 잘 보살펴 줘
죽음의 의식을 치루는 이틀은 혼비백산한 채 흘러갔다.
80년의 세월을 살고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데는 3일이 걸렸을 뿐이었다.
4남 2녀가 실타래처럼 늘어놓은 인연의 실타래는 대단했다.
80개가 넘는 화환에 특실도 모자라 맞은편 빈소까지 빌려서 맞이한 조문객들…
몇 년 동안이나 조용함 속에 희로애락을 느끼지 못하신 아버님은 돌아가시는 길에서
수많은 인파의 소란과 가득한 꽃 길을 지나셨다.
어머님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매장 안 할 거다
못쓸 병 자식들에게 전 해지지 않게 화장해서 절에 갖다 놓을 거다.
그리고 너희 때는 몰라도 손자들 대에는 먼 시골 선산에 모셔 놓아도 제대로 돌보지
못할 거다.”
어머님의 뜻에 따른 장례절차는 너무 간소했다.
그 무더위에 우린 서늘한 장례식장에서 손님의 조문을 받았고 아침 일찍 화장장으로
가서 시신을 봉헌했다.
막상 담담하다가도
염할 때와 아버님 시신이 불 속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모습에는 설움이 다시 복바쳐 올랐다.
구암사 법당에 아버님 유골 안장과 제사 그리고 고산사의 49제를 고하는 의식을 끝으로
죄인인 자식들은 두 시 쯤에 모든 절차를 마무리 했다.
그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 모실 때처럼 고생도 안 한 채 너무 쉽고 성의없이 아버님을 보내
드렸다.
80여 년의 세월은 그저 한줌의 재로 남았다.
인생이란 그리 허망한 거다 .
살기에 바빠 세월이 지나다 보면 아버님은 자식들에게 또 쉽게 잊혀지겠지.
그러다 보면 자식들 또한 병들고 쇠약해져 하나씩 떠나겠지….
우린 그렇게 아버님을 보냈다.
갑작스럽 天崩으로 온 가족이 황망하고 당황스런 가운데 아버님을 보냈습니다.
그 동안의 고난과 척박한 삶의 힘겨움을 내려 놓으시고 아버님은 온통 새하얀 국화꽃
사이로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축복을 받으며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파란만장한 삶과 지나간 숱한 세월을 한갖 바람에 흩어질 한 줌의 재로 남기고 훨훨
날아 가셨습니다.
부모자식의 인연으로 만나 자식들을 위해 당신은 더 힘드신 삶을 사시다가 정작 자식들
장성하여 살만할 때 쯤 잘 있으란 인사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가셔서 서럽고 아쉽지만 아버님께서는 이제야 편안하실 거란 믿음으로
애써 슬픔을 위로 합니다.
용서하소서
우린 아픈 통곡도 못하고 슬픈 울음으로 고작 한줌 아버님 육신의 재를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인생은 허망하고 삶과 죽음은 그렇게 등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더 잘해드리지 못하고
정신 맑으실 때 더 살가운 아들이지 못해 죄송스럽니다.
떠나실 때서야 슬픔의 눈물을 훔치는 가증스런 저희를 부디 용서하소서
아버님 이름이 욕되지 않도록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저승에서 정신이 돌아오시거든 부디 어머님과 우리 형제들 보살펴 주소서
바쁜 장례가 지나고 초제도 지난 오늘 새삼 복바쳐 오르는 설움을 누르며 이렇게
국화 한 송이를 바칩니다.
아버님 이승의 한과 아쉬움 일랑 접으시고 부디 영면하소서…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15년 하고도 5개월을 어머니는 홀로 사셨다.
꿋꿋하고 씩씩하게 홀로 사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천은 그 결이 달랐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우리 곁에 남겨두고 가셨지만
어머니는 천붕의 솟아날 구멍을 모두 막고 떠나셨다.
이젠 우린 무너진 하늘 아래서 살아 가야 한다.
여전히 새들이 노래하고 꽃은 피겠지만 마음 한구석 쾡한 바람 구멍은 누가
막아줄 수 있을까?
우린 어느 길목에 주저 앉아 목 놓아 울 수나 있을까?
목 놓아 울면 누가 내 등을 뚜드려 줄까?
엄마
아무도 외로운 엄마 등을 뚜드려 주지 않았는데 그 외로운 인생 어찌 사셨나?
어릴적 우리 키우는 재미로 사셨다지만
서럽게 늙어 간 세월
시린 어깨로 불어 드는 찬 바람조차 맞아주지 못한 무정한 자식은 왜 원망조차
안하셨나?
엄마 고마워요.
아버님 떠나고도 그래도 우리 곁에 오래 계셔 주셔서 ….
지 바쁘고 지 재미 있을 때는 정작 찾을 생각 못했어도
효동 가면 늘 거기 계셔 주셔서
그래도 엄마하고 애기하고 드라마 보면서 추억 만들 시간 많이 주셔서…
정작 계실 때는 몰랐는데
떠나고 나니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한 마디도 못한 게 이렇게 아프네 ….
엄마 오늘은 아버지와 좋았던 추억만 생각하시고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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