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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헤밍웨이 행복론

 

 

헤밍웨이의 행복
자기자신의 손이 닿는데 꽃밭을 가꾸는 것

행복은 거창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이 닿은 곳에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친구처럼 ~

헤밍웨이의 행복의 법칙
행복은 풍선 찾기와 같다.

방 안 가득한 풍선 풍선 중에 자기 풍선은 아무리 찾으려 애써도 찾기 어렵다.

잡으려 애쓰면 오히려 잡히지 않는다 ᆢ
행복은 남의 풍선을 찾아주는 것

남의 풍선을 찾아 주다 보면 누군가 내 풍선을 찾아서 가져다 준다.

다른 시람의 행복을 먼저 찾아 주다 보면 누군가 내 행복을 가져다 준다.
먼저 마음을 비우고 주어진 작은 기쁨에 감사하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다 보면 행복은 홀연히 찾아온다.
내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인 행복론과 궤를 같이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내 집 처마 밑에 걸려 있고

내 눈 길이 닿는 가까운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 다닌다.

먼지 가득한 세상에서 침침해진 내 눈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일 뿐
욕심에 어두워진 내 마음이 행복을 행복이라 여기지 않는 것일 뿐

헤밍웨이는 자신의 노년을 단순히 퇴색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늙는 것을 극도로 싫어 했으며 노인으로 취급 받는 것을 극한의 모욕으로 여겼다..

그의 인생은 젊음을 상징하는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의 사냥

카리브해에서의 대어 낚시

열정적인 집필! 등은 그가 나이와 싸우며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의 도전의 역정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 산티아고라는 인물을 통해 그의 인생철학과

불굴의 도전정신 잘 보여주고 있다.

 

고기를 잘 잡지 못해도 출어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바다로 나갔던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데 성공하지만 상어에게 다 뜯기고 앙상한 뼈만 가지고 항구로 돌아 온다,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괴될 수 있지만 정복될 수는 없다.”는 노인의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아무런 성과 없는 사투와 귀향에도 낙담하지 않는다.  

노인은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고 다시 바다로 나갈 것이다.

.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일상과 가까운 친구에게 있다고 설파한 헤밍웨이의

행복론에 근거해서 행복은 다른 사람의 풍선 찾아 주기와 같다는 헤밍웨이 행복의 법칙이

탄생되었..

 

하지만 헤밍웨이는 아아러니하게도 62세의 젊은 나이에 엽총으로 자살했다.

행복을 지키기 위해 불행의 싹을 도려낼 용기가 없었던 헤밍웨이는 자신의 목숨을 마지막

행복의 제물로 바쳤다.

내가 배웠던 영문학과 교수는 해밍웨이는 햇빛이 눈부시게 따뜻한 날 "오늘이 죽기 좋은 날! "

이라는 말을 남기며 방아쇠를 당겼다고 했다.

하지만 문학적 미화 였을 뿐 헤밍웨이는 비행기 추락사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글을 쓰기

어려워지고 말년에  친한 친구들이자 문학적 동반가들인  월리엄예이츠, 스콧 피츠제랄드,

제임스 조이스 등을 잃으면서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자기 저서의 편집자로 낚시와 사냥을 함께 하던 맥스퍼킨스 마저 세상을

떠나자 지나친 슬픔으로 병적인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자살 이라는 극던적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헤밍웨이가 삶의 많은 의미를 친구와 또는 주변의 관계에 두고 살았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도전과 모험으로 정적인 그의 글쓰기 직업의 균형을 맞춰 나간 그는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던 두 개의 축이었던 글쓰기와 친구의 상실로 삶의 희망과 기쁨을

잃었던 것 같다.

더 나아질 수 없는 자신의 삶을 확인한 순간 다른 사람의 풍선을 찾아줄 마음의 끈마저

놓아버린 것이다.

 

그의 불굴의 의지와 투혼은 자신의 임계치를 벗어난 삶의 압박에서 길을 잃었다.

불행으로의 초대를 단호하게 거절한 그의 용기가 존경스럽긴 하지만 자신의 행복론을

설파하고 행복의 법칙을 이끌어 낸 그였기에  삶의 용기를 잃지 않고 빼앗긴 행복을 되찾을

노력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도전과 성취의 삶도 중요하고

일상도 중요하고

가족도 중요하고

친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내 마음 아닐까?!

 

 

 

옛날 행복 전도사로 이름을 날리던 최윤희씨가 있었다.

희망적인 책을 20권이나 썼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퍼날라 주었다.

 

 

밥은 굶어도 희망은 굶지마라

딸들아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나라

멋진 노후를 예약하라

행복의 홈런을 날려라

웃음으로 펀 지수를 높여라

 

그리고 이런 유서를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떠나는 글...

 

저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습니다.

능력에 비해서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 밧데리가 방전된 거래요.

2년 동안 입원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전주 폐에 물이 찼다는 의사의 선고..

숨쉬기가 힘들어 응급실에 실렸고 또 한번의 절망적인 선고.

그리고 또 다시 이번엔 심장에 이상이 생겼어요.

 

더 이상 입원에서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혼자 떠나려고 해남 땅끝마을 가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남편이 119 신고, 추적해서 찾아

왔습니다.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수가 없고 남편은 그런 저를 혼자 보낼 수는 없고...

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텔에서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 또 용서를 구합니다.

너무 착한 남편,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입니다.

그동안 저를 신뢰해주고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리라 생각

합니다.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2010.10.7

 

(봉투 겉면에 적은 글)

완전 건강한 남편은 저 때문에 동반여행을 떠납니다.

평생을 진실했고 준수했고 성실했던 최고의 남편.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사람마다 보이는 것과 다른 고뇌가 있다.

감정이입까지는 어렵더라도 드러난 사실 만으로도 그것은 심정적인 동정심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신의 판단 기준은 인간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열심히 사는  어느날 신은 무표정의 얼굴을 한 채 벽돌을 들어 누군가의 뒷통수를 내려 친다.

우린 그것을 업보라고도 하고 불운이라고도 한다. 

우린  늘 행운과 신의 자비를 구하지만  삶을 살아보지 않고는 그 저울의 기울기를 도통 알

수가 없다.  

다만  신은 저지르고 인간은 수습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걸 견디거나 포기하거나 선택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귀속된다.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헤밍웨이 였다면 ?

죽을 병은 아니니 죽을 용기는 없었을 거구, 원래가 나를 끔찍이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인

데다 가진 게 많았을 터이니 다른 것으로 마음과 정을 붙이면서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

했겠지.

아니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의 공식을 만든 사람이니 최소한 불행에 굴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63세면 우울증만 잘 치료하면 그 재능으로 멋진 희망적 소설을 몇 권은 더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글을 쓰다 보면 스스로를 치유할 힘도 생길 수 있고….

아서라!

봉황의 뜻을 뱁새가 어찌 헤아리리요?

누군들 그 상황이 되어 보지 않고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으랴?

아 그래서 우린 불행한 봉황보다도 행복한 뱁새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개똥 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 했으니 노밸문학상을 받고 63세에 떠난 헤밍웨이 보다

 66세에도 시푸루둥둥 살아 있으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누리는 무릉객이 더 낫지

않겠나?

그 또한 무릉객의 기준과 생각일 뿐이겠지만 ... 

 

내가 최윤희 였다면?

당근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오래 인생을 끌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수 많은 대중들을 기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자가 거짓 행복을 전도 했으므로….

정말 고통스러웠으면서 자기까지 속이며 행복한 체 하기가 정말 힘들었을 테니까.

굳이 사랑하는 남편을 데리고 가지 말고 사랑하는 남편을 안심시키고 다시 돌아와서

나중에 햇볕 따뜻한 날 혼자 죽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어느 조용한 날의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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