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 샤드는 BC 8세기 ~ 3세기 쓰여진 책으로 배다 경전의 일부분이다.
인도 철학의 정수
쇼팬하우어가 극찬한 고전이다,
“ 우파니샤드는 이 세상의 모든 책 가운데 가장 값진 숭고한 책이다.
내 인생에 위안을 주었다.
내 임종 자리에서도 위안을 둘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우파는 가까이
니는 아래로
사드는 앉는다.
즉 스승의 발 밑에 앉아서 전수 받는 가르침 이라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가 일상 생할 속에서 질문을 주고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대화를 엮은
것으로 논리적이고 철학적이기 보다는 직관적이고 영적이다.
스스로의 깨달음과 체험, 그리고 초월적인 지혜를 강조한다.
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멈추어 즉 고행, 명상 등을 통해 진전한 본성에
이르기 위한 것 즉 참된 자아를 찾지 위한 과정
아트만 : 자아 나 “호흡”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로 SELF, SOUL, 내면의식 , 지각력의
의미이다.
브라만 :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가 돌아
가는 곳이다.
그 속에서 모든 존재는 선과 악의 이원성을 초월하여 하나로 통합된다.
범아일여 :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
아트만을 깨닫고 브라만 안에 머무름으로써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기쁨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아트만과 브라만은 둘이 아니다.
아트만 수행을 통해 참나를 되찾아 브라만과 하나가 됨으로써 범아일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지고한 빛과 사랑의 근원인 자신의 참 자아를 깨달아야 비로소 브라만의 우주적인
합일 상태로 들어 간다.
참 자아를 찾지 않으면 인생은 고통일 뿐이다.
버림으로 즐거움을 얻는다.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100년도 안되는 찰라의 삶이다.
탐욕의 그릇은 채움으로써 만족을 얻지 못한다.
앎이란?
견해를 갖지 않은 자 그에게는 앎이 있는 것이다.
견해가 있는 자 그는 모른다.
구분하여 아는 이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구분하여 알지 않는 이들에게는 잘 알려진 것이다.
-깨나 우파니샤드
아트만의 깨달음은 눈으로 얻을 수 없고 또한 언어로도, 다른 신들에 의해서도,
고행을 통해서도 그리고 행위를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지혜의 해맑음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이 정화된 사람은 선함에 들어 경계의 구분이 없음을 보는 것이다.
에고 : 집착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디.
참자아는 슬픔에 젖지 않는다.
한 나뭇가지에 새가 두 마리 앉아 있다.
한 마리는 열심히 열매를 따 먹고 다른 한 마리는 묵묵히 뒤에서 지켜 보고 있다.
탐닉하는 새 - 에고
바라보는 새 – 참자아
앉아 있는 나무 육체
탐닉하는 새가 따 따먹고 있는 열매 – 행위
원래 인간은 고독 하였다.
그 본성은 고독하고 싶어하고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고 싶다.
마음 한 가운데 나와 오롯이 혼자 대면하고 싶은 갈망이 존재하고 그것이 가능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 있다..
지신의 깊은 내면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고 깨달을 얻는 구루의
도움을 통해 참나를 만날 수 잇다.
브라만
브라만은 모든 생각을 넘어서 존재한다..
가장 큰 것 보다 더 크고
가장 작은 것 보다 더 작고
가장 멀리 있는 것보다 더 멀고
가장 가까이 있는 것 보다 더 가까이 있다.
감각이 닿지 않는 심장의 깊은 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깊은 명상으로 고요해진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
모든 말과 행위 너머에 있다.
고행이나 제사로는 알 수 없다.
토론이나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도 깨달을 수 없다.
감각의 바람이 가라 앉은 순수한 가슴으로만 볼 수 있다.
.브라만을 깨달은 사람은 모든 일을 브라만의 일로 알고 한다.
먹고 마시는 걸 걱정하지만 필요한 대로 얻는다.
브라만애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참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브라만은 마음을 다해 참자아를 찾은 자에게 모습을 드러 낸다.
굳은 의지와 간절한 기도 그리고 자만심과 애착을 포기하면 드러난다.
에고의 의지를 내보내고 완전한 참자아에 머문다.
죽으면 브라만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된다.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불멸의 세계에 이른 참자아는 브라만 속으로 흡수되어
브라만과 하나가 된다.
참자아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의식과 형태에서 벗어나 순수의식인 브라만에
잠긴다.
가슴의 고통과 슬픔의 사슬을 풀고 선악의 이원성의 바다를 건너 불멸의
존재가 된다.
세상의 진리와 교육은 참 교육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찾는 것이 참 교육이다.
전달과 생각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논리나 토론으로 깨달을 수 없다.
경전이나 지식을 통해서 구하지 못한다.
감각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 마음을 고요하게 잠재우지 못하는 사람 명상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참자아를 구하지 못한다
죽음도 참자아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심장의 비밀스런 동굴 속에 에[고의식과 지고한 참자아가 함께 머물고 있다.
에고 의식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쓴 열매와 단 열매를 번갈아 따 먹으면서
쓴 것을 싫어하고 단 것을 좋아하는 희로애락의 파도를 타고 있다.
참자아는 무슨 일어 일어나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그저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에고 의식은 부단히 무언가를 갈망하고 참자아는 빗 속에서 조용히 지켜 보고 있다.
참자아는 에고를 태우고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 영원 불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다리가 되어 그 불이 마음에서 활활 타오르게 한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깨어 있으면 맑은 식견을 갖출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하고
순수한 사람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참자아는 육체라는 수레를 타고 가는 주인이다.
너의 식별능력은 수레를 모는 마부이며 마음은 말을 제어하는 고삐이다.
감각기관은 말이다.
감각이 쫒는 여러 대상은 말이 달리는 길이다,
육체와 마음과 감각기관이 그대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찾아 오는 번뇌의 마당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마부의 식별능력이 어둡고 고삐인 마음이 훈련되지 않는다면 감각기관은 야생마
처럼 이리저리 날뛰게 된다.
식별능력이 밝게 깨어 있으면 그대의 감각기관은 잘 깨어 있는 말처럼 그대의
명령에 고분고분 복종한다.
마음이 혼란한 사람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맑은 식별력을 갖추고 마음이 고요하고 가슴이 순수한 사람은 삶의 목적지에
도달하여 영원한 신성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태어남과 죽음이 반복되는 고통의 세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감각의 대상이 있어 감각이 생기고 감각의 대상은 마음으로 인식되며 마음 너머
에는 직관적인 지식이 있고 직관적인 지성 너머에는 우주의식이 있다.
우주의식 너머에는 모든 것을 품고 있으나 아직 구체화되어 있지 않은 잠재의식이
있고 잠재의식 너머에는 푸루샤가 있다,.
푸루샤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푸루샤가 곧 우주적인 의식인 브라만이다.
기원전에 저술된 우파니샤드는 불교 경전의 모태이고 모든 철학자 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우주에 모래알처럼 미미한 인간의 존재는 기원전에 이미 마음과 정신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보고 무한한 우주까지 정신세계의 지평을 넓혔다.
수렵과 채취의 원초적인 삶에서 농경문화를 거쳐 이 거대한 기술적 과학적 진보를
이룩한 눈부신 물질문명의 발달과 비교하면 정신의 발달은 참으로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의 진보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것들은 깨달은 사람에게 국한되고 전수되기 어렵다.
우파니샤드에서 갈파한 것처럼 참자아의 깨달음은 영적인 그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자아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이 구해야 한다.
콘크리트 숲에서 기거하며 수 많은 세속의 소음과 세상이 설파하는 수 많은 가치에
혼란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이 참 자아를 만나 삶의 도를 깨우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정신적인 수양을 통해 자신이 마음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끝없는 욕심과 미망에서 벗어나고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참자아를 깨워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선지자들의 지혜에서 실마리를 얻어낼 수 있고 자연 속에
서의 명상과 사색
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그 길을 따를 수 있다.
2024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