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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가는 대로

내 인생 후배의 회갑

 

 

 

 

내 5년 후배
친구의 회갑을 축하하며ᆢ

이녀석은 참 대단한 녀석 입니다ㆍ
사람들에게 늘 베풀기를 걸 좋아 합니다 ㆍ
이녀석을 만날 때는 항상 기분이 좋아집니다 ㆍ

늘 배고픈 친구들을 걱정하며 살아 가지만

몇몇 노인들 빼고는 이 녀석을 싫어하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ㆍ

 

이녀석을 처음 만난 건 7살 쯤 되었을 때니까 벌써 60년이 다되어 가네요ㆍ

한동네 부자 친구 집에서 만났지요
어린 나이에 그녀석을 처음만나고 나서
나는 그 친구에게 정말 홀랑 반하고  흠뻑 빠지고 말았습니다 ㆍ

태어나서 처음 맛 본. 인생의 깊은 맛이 었습니다 ㆍ
친구는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고

우리의 오랜 우정은 그렇게 오랜 세월 이어져 왔습니다 ㆍ

그 따뜻한 마음과 속깊은 사랑을 가슴시리게 느끼고

우리의 우정이 더 깊어 진건 군대 시절 이었지요 ㆍ

그 외롭고 배고픈 시절 우리는 할매집을 드나들며 뻔질나게 만났습니다ㆍ
동초를 섰던 흰 눈이 펑펑내리는 날
하얀 소주 한병을 앞에 두고 만난 친구는
그렇게 내 마음에서  달이되고
한 편의 시가 되었습니다ㆍ

우린 산에서도 자주 만났지요
우린 세상의 아름다운 가경을 앞에두고

무수한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 더랬습니다ㆍ

세월이 가도  우리의 우정은 변치 않았지요 .

하지만 늘 서로가 끼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던 우리의 우정은

조금씩 성숙해 갔습니다ㆍ

세월은 빨리도 흘러 갔고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만났습니다ㆍ

너무 자주 얼굴을 맞대지 못한다는 건 서로의 삶에 충실한 시간이었을 뿐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격이 없는 편안함 사라졌다고
우리의 우정이  세월에 빛바랜 건 아니 었습니다ㆍ

친구는 늘 아름 다운 세상으로 가는 여행길의  동행이자 든든한 후견인 이었습니다ㆍ

우리는 안나 푸르나도 함께 다녀왔습니다ㆍ
이국 고산설릉의 쓸쓸함과 삶의 허기를  달래준 것 또한 친구였습니다 ㆍ

오늘이 친구의 회갑입니다ㆍ  1963년 9월 15일.
늘 받기만 하다보니 그게 마치 당연한 것 처럼 

그동안 변변한 마음조차 전하지 못했습니다ㆍ

오늘 비로소
내 인생의 수 많은  황홀한 여정을 묵묵히 지켜준 친구에게
이 글을 빌어 그간의 우정과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ㆍ

친구야 고맙다 ㆍ
세상은 변하고 나는 늙어가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네가 내 친구라 좋다ㆍ

이제 더 넖은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너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뿌듯하다ㆍ

너도 바쁘게 살고 나도 바쁘게 살면서 예전처럼은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얼굴도 보고  즐거운 자리에서 자주만나자ㆍ

너의 회갑을 축하하고
변함없는 우정과 너의 승승장구를 기원한다ㆍㆍ


                                                                       변함  없는 친구 무릉객 

 

 

 

 

 

 

 

라면은 1963년 9월 15일 태어났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한국 사람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던 1961년 어느날
삼양식품(주) 전중윤 사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배고픈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봅니다.

전 사장은
"저 사람들에게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게 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전 사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제조하는기술을 들여옵니다.
하지만 외화가 없고 국교가 단절됐던 때라 라면을 제조하는 시설을 들여오기는 하늘에

별따기였습니다.
정부가 가진 달러를 민간이 원화로 사던 시절, 한 라인에 6만 달러인 라면 제조 시설을

수입하기엔 전 사장도 돈이 부족 했고 가난한 정부도 옹색하긴 마찬가지 였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전 사장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JP)씨를 찾아갑니다
“국민들 배 곯리지 말자”는 전 사장의 호소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세도를

가진 JP는 마침 농림부가 가지고 있던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전 사장이 사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우정은 이후 오랜 세월 이어집니다.
신용장을 열고 전 사장이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의 반응은 냉담 했답니다.
일본도 어렵던 시절, 라면 제조시설을 국교도 없는 한국에 선뜻 팔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전 사장은 묘조(明星) 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 한국의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다음 날 대답을 들으러 다시 찾은 전사장에게 오쿠이 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많이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가본 일이 없고 아직 국교 정상화도

안 됐지만 한국전쟁이 일본 경제를 재건해 준 셈이다.
당신들은 불행했지만 우리는 한국전쟁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
내가 민간 베이스로 기술을무상으로 제공하고 시설도 싼 가격으로 제공하겠다.“
오쿠이 사장은 한 라인에 6만 달러라던 라면 제조시설을 두 라인에 2만 5.000 달러

로 즉석에서 발주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면과 수프의 배합에 관한 일화도 있습니다
전 사장은 일본 현지에서 라면제작의 전 공정을 배우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끝내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은 가르쳐 주지 않더랍니다.
전 사장이 끝내 비율을 못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 사장에게 전해줍니다.
비행기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 안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수프의 배합비율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국민들의 배를 채워줬던 라면은 이렇게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1963년 9월 15일 삼양 ‘치킨라면’ 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가격이 10원, 식당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30원이고, 커피 한 잔이 35원

이던 시절이니 저렴한 가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애국자들의 덕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세계10위권 경제대국에 진입하고

고픔을 벗어났는데 갖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국가관도 없고 애국심도 없고 또 미래 안목은 고사하고 기본 인성조차 없는 쓰레기

정치인들을 퇴출시켜 정치를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 좋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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