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제 6강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공히 천명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지만 공자는 그
해결책을 인(仁)이라는 씨앗으로 인간의 내면에서 찾았기 때문에 인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교리와 규범은 는 인간의 내면에서 답을 구하기에 주관성을 극복할 수 없다.
노자는 자연에서 해답을 찾았다.
자연은 가치가 개입되지 않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투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하게 천명을 극복한 사람은 노자이다.
주관성을 극복할 수 없으면 가치론으로 나갈 수 밖에 없고
가치에 의존함은 특정한 기준이 설정되어야 한다.
특정한 기준이 설정되면 구분이 시작되어야 한다,
구분이 시작되면 한쪽을 억압하거나 그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이 시작된다.
노자의 꿈은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분법적 논리로 노자를 재단 할 수 없다.
공자가 인간들 속에서 인간의 도리와 관계를 역설하고 노자가 자연을 강조했다고
공자는 문명적이고 입세적이며 노자는 비 문명적이고 초월적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공자가 배움을 강조한다고 노자가 교육에 적극적이지 않은 건 아니다.
노자는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 갔다.
둘다 꿈꾸던 세상의 지향점은 같았지만 방향성과 길을 찾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1장이 가장 중요하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 말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도가 기준과 형식을 가지면 도가 아니다.
말로 표현하고 설명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도가 아니고 개념을 정의하고 풀이하는 순간 그 존재의 실체가
아니다.
이것은 군자와 소인이 뒤바뀜, 계급의 혼란 ,정치구조의 혼란, 세계관이 혼란 속에서
수많은 가치와 이데올로기로 생멸과 변화의 겪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존재하는
불멸의 본질 가치에 대한 설명이다..,
도는 언제라도 상도요, 명도 상명이다. 도나 이름은 언제라도 변할 수 없는 것이다.
- - 도인이 풀이하는 도덕경 강론
도는 우리가 걸어 다니는 길인 동시에 우리의 생각이 작용하는 원리와 방법을 상징한다.
[도덕경]에서 궁극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생각의 원리와 방법이다.
두 발를 조화롭게 사용해야 잘 걸어 갈 수 있듯이 생각도 두가지를 조화해야 잘 살아 갈
수 있다.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이름을 개념화할 수 있다면 이름이 아니다.
나훈아 라는 도인이 있다.
그는 사랑이라는 도를 눈물의 씨앗으로 보았다.
정의를 내리고 울타리에 가두었다.
사람은 기쁨도 있고 그리움도 있는데 슬픔으로 정의해 버림으로써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심수봉이라는 도인은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고 하였다.
정을 이야기했지만 사랑은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다.
심수봉 도인이 노자의 철학적 사조에 더 가깝다.
이것이 노자의 명가명 비상명의 숨은 의미 이다.
공자의 도는 인도와 가도이고 - 사람의 도이고 변할 수 있는 도
노자의 도는 천도와 상도 상명 - 하늘이 도이고 변하지 않는 도
공자의 도는 무엇(what)dl 중요하고 노자의 도는 어떻게 (how)가 중요하다.
노자의 무(無)
시작은 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이 가능해지는 영역 그것이 무(無)이다.
이 세계에 자기의 구체적인 영역이 없지만 이 세계의 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영역이다.
무, 무위는 노자의 도덕경을 정반합의 원리에서 설명하는 노자 사상의 뿌리이다.
무는 천지의 시작
무는 만물이 의미
항상 무로써 숨겨진 미묘함을 관조하고
항상 유로써 드러난 겉모습을 관조한다.
유와 무는 하나로 같이 있다 (자양지동)
밖으로 나와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하나로 같이 있음을 현이라고 한다.
같이 있고 또 같이 있다.
모든 미묘함의 문이다.
유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 무는 눈에 보이지 않은 그 너머의 광활한 공간이다.
그것은 동출이이명 (同出而異名) 즉 같은 곳에서 나와 가치와 높이와 순서가 없다
유와 무는 노자가 세상을 보는 두 개의 창이고 상호 대립과 공존을 통해 세상을 만들고
운행하는 원리에 해당한다.
즉 유와 무의 대칭적 상관관계가 도의 내용이다.
문은 들고 나는 공간이다.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이 교차하는 지점)
강의 소감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 도덕경은 윤희의 청을 받아들여 노자가 하룻밤 사이에 쓴 5천자의
글로 이뤄진 우리 인생의 귀감이 되는 내용이다.
노자가 속세를 떠나고자 함곡관을 지날 때 윤희는 노자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 채고
“이제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시면 다시는 속세 로는 돌아오지 않으실것 같으니 부디
후세들을 위해 좋은 말씀을 남겨주십시오” 라고 청했다는 글이다.
대립과 공존의 언어를 통해 설파하는 경구는 단순하면서도 선문답처럼 뜽금없고 난해하다.
도의 경지에 다다른 도사가 쓴 글이니 범인이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하지만 동서고금의 수 많은 도사와 철학자들이 노자가 일필휘지로 휘갈겨 쓴 글을 골머리
싸매가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풀어낸 주석들이 있고 또 이렇게 풀어서 강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린 희미하게나마 그 심오한 뜻에 다가갈 수 있다.
근데 사실 그 글의 의미를 너무 확대 해석해서 사람들이 너무 설레발을 치고 야단 법석을
떠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삶을 달관한 노자라는 도인이 세상을 살아가고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과 생각을 이야기
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맞는 도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하는 내용인데 원작자
의 의도와 상관없이 너무 거창한 해석과 의미부여를 한게 아닌가?
참새가 봉황의 깊은 뜻을 어찌 알랴 만은 읽으면서 어렴풋이 그 속 뜻이 느껴지지도 하고
있는 그대로 해석해도 명쾌하게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희안한 건 내가 살면서 자연과 산으로부터 들은 얘기나 명상과 사색을 통한 깨우침이 노자
의 말씀에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는게 침으로 신기한 일이다.
내가 깨달은 노자의 도.
궁극의 나의 도란 이런 것이다.
스스로 알아차리고 납득해야 하는 도이고 누구에게 설명하는 도가 아니다.
나의 이름은 그런 것 이다.
남들이 부르고 남들이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가 아니고 내가 조용한 시간에 만나고 내가
존재의 기쁨과 흔들림으로 알아차리는 내가 진정한 나이다.
천지는 광활하다.
나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내가 세상을 열고 세상의 문을 닫는 이 세상의 주인이다.
그 광활한 천지를 벗삼아 자유롭게 나의 생각과 뜻을 펼쳐야 하고 세싱에는 눈앞에 보이는
것 보다 더 크고 심오한 그 무엇이 있는 법이니 어리석은 소견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나 작은
욕심으로 큰 것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삶의 길은 여러 갈래이니 치우침과 부족함을 탓하지 말고 신비로운 세상을 마음껏 누리면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자
,
2024년 10월 3일